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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8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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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2023년 6월 8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마르코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34) 마르코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토빗기 6,10-11; 7,1.9-17; 8,4-9ㄱ)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코 12,28ㄱㄷ-34)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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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코 복음
12장 28ㄱㄷ-34절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8일 (목)
김대용 바실리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1:4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8일 (목)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31

📌 강론시작 21:0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8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5

📌 강론시작 10:3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8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27

📌 미사시작 1:03:08

📌 강론시작 1:15:0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가로막은 장막을 걷어 내는 용기.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적대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이례적으로 예수님께 호감을 보이는 율법 학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모습도 그러하고("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오늘 복음에서 생략된 구절]),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께서 이례적으로 율법 학자에게 보내는 찬사의 말씀도 듣게 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많은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적개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촌뜨기 나자렛 사람이 감히 전문가들인 자기들 앞에서 율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하는 모습이 그들은 영 못마땅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교육을 결코 받았을 리 없는 자가 그토록 중요한 안식일 법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아본 그는 율법 학자로서 평소 품고 있던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 질문은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논의되던 주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한 셈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율법의 밑바탕에 놓인 핵심을 짚어 주시는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결국 귀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은 우리에게도 많습니다. 그 자체로 좋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잘못된 선입견을 거치게 되면 나쁘고 추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다가가려면 먼저 그것을 가로막는 장막을 걷어 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찬사를 얻어 낸 율법 학자처럼, 그 장막을 과감히 걷어 낸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좋고 귀한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신앙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바쳐야 할 기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청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모든 기도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기도 다음 나의 청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 아오스딩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실린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거기서 기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다 성인도 “우리는 이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을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청원만을 외치는 공허한 기도가 되어서는 단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외치셨던 많은 성인·성녀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청원에 앞서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만 이루어지길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뜻이 먼저다 보니 하느님 뜻은 아예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 생활의 고민을 예수님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계명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이는 오히려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면서, 쓸데없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과연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사랑 없는 종교 생활은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합니다. 따라서 철저히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무지한 사람일수록 남을 경멸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포용력이 있는 법이다.

- 필릭스 레크에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사랑의 원리.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1936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39년 미국의 서사적 역사 로맨스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남부의 미인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남북 전쟁 중과 이후의 격동적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합니다. 

스칼렛은 아일랜드 이민자 농장 소유주의 딸입니다. 그녀는 강인하고 계산적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식성이 풀립니다. 그녀는 고상하고 지적인 이웃 애슐리 윌크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부하고 그의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업가 레트 버틀러가 그 대화를 우연히 듣다가 스칼렛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스칼렛은 레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상심한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레트는 남북 전쟁에 참여해 사망합니다. 스칼렛은 그리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을 해야 했습니다. 

스칼렛은 끊임없이 멜라니의 남편 애슐리가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애해 봅니다. 그러나 애슐리에겐 멜리나뿐입니다. 멜라니는 사촌 스칼렛의 마음을 알지만, 타고난 침착함으로 스칼렛과 잘 지냅니다. 스칼렛은 이제 망해버린 집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프랭크 케네디와 혼인을 합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고 남편도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스칼렛은 남편의 죽음보다는 애슐리의 부상에 더 마음 아파합니다. 

스칼렛의 결단력과 힘을 좋아한 버틀러는 드디어 세 번째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버틀러 덕분으로 보니라는 귀여운 딸도 낳습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버틀러는 잠자리도 거부하는 스칼렛 대신 딸을 보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보니도 말을 타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멜라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스칼렛은 멜라니도 자신에게 큰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또 멜라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심 없는 애슐리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애슐리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버틀러뿐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붙들려 하지만, 버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도 없는 그 집에 살지 않겠다며 스칼렛을 떠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이런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분명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위가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뱀이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존재 자체가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 뱀은 애슐리에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남는 것은 뱀과 공허뿐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셔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했을 텐데 그러면 사랑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야 자아의 본성적인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과 함께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이 담긴 양식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목적이 저절로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에 모기처럼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그 사랑이 되는 길은 사랑을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 지나간 뒤에.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미움밖에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사랑을 포기한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확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깨닫고 나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 강아지라도 사랑할까 저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데 지금은 강아지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여러 번 자기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경험을 한 다음부터,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버겁다고 느낀 다음부터 인간 사랑을 포기하고, 강아지 사랑밖에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어 할까? 왜 인간은 사랑 타령을 그리도 좋아하고 많이 할까? 그 근원을 생각해보니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사랑이 거부당한 경험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거나 사랑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그 반감으로 오히려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면서 인간에게는 꼭 뭘 바라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훌륭하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하면 뭔가 응답이나 보답이 있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치 않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아무튼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실패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하느님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하고 싶지만 가장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보이지 않는데, 응답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느낍니까? 그러니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사랑하겠노라고 감히 까불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진 사랑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겸손히 청하며 사랑의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현존 체험은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하늘이 보이듯 감각적 인간 사랑이라는 구름이 걷혀야 감각을 넘는 하느님 사랑이 보입니다. 

엘리야는 사랑은커녕 적대자와 원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쳐 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하느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나간 뒤에야 주님은 보이고 들립니다. 거창한 기적과 함께 강하고 자극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길 지금까지 바랐다면 그런 것들이 다 지난 뒤에야 하느님은 나타나실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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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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