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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1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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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였노라.

주님, 이 놀라운 성찬의 성사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성체 성혈의 거룩한 신비를 공경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11일 (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코린토1서 성경 말씀 카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1코린 10,17)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1코린 10,17) 코린토1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8,2-3.14ㄴ-16ㄱ)
    하느님께서는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몰랐던 양식을 먹게 해주셨다.

  • 제2독서
    (코린토1서 10,16-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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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요한 복음
6장 51-58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1일 (일)
이기범 요셉 신부 집전

 

📌 성체 성혈 대축일 소개 00:05

📌 속초 동명동 성당 소개 01:21

📌 미사시작 03:09

📌 강론시작 21:0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1일 (일)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06

📌 강론시작 21:0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1일 (일)
팔로티회 홍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5

📌 강론시작 20: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냅니다. 미사 때마다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의 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놀라운 신비를 기억하고, 그것을 먹고 마시며 주님을 실제로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생활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손수 ‘하늘에서 내려 주신 빵’, 곧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다른 먹을거리가 풍족하였다면, 하늘에서 어떠한 음식이 내려올지라도 그 가치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오로지 당신께만 의지하기를 바라셨기에, 메마른 광야에 머물게 하시어 먹을 것 없이 허덕이는 그들에게 생명과 같은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오로지 당신께 의지하는 길이 살길임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참된 양식이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이 단순히 당신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와 성혈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새로운 만나가 되시어 그것을 먹는 이에게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신앙인들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지니신 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몸소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을 통해 변하는 삶

 

복음을 읽다 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뒤에 군중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도 합니다(요한 6,15 참조). 놀라운 빵의 기적을 통해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군중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을까요? 그러나 돈 많은 부자같이 먹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쫓아다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냈던 놀라운 장면에서는 쫓아다녔다는 말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육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은 구원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보다 더 큰 문제인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보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빵과 물고기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채워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100%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언젠가 내려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나의 행복 전체가 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이것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즉 주님의 뜻을 다르며 함께할 때 진정한 포만감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성체 성혈을 통해 진정한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체와 성혈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지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보지 못하면 성체와 성혈의 은총을 얻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것만을 얻으려는 마음만으로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제가 나눠 주니까 당연히 받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삶이 변화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참 구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등불을 켜면 결국 자신의 길도 밝히는 것이 된다.

- 벤 스위트랜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체의 열매 : “할 수 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성체성사로 삽니다. 만약 냉담하게 되는 신자가 있다면 성체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하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성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기를 낳고는 불안증으로 한강에서 아기와 함께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걸어 잠가도, 친정어머니를 찾아가도 그 불안증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고로 결국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기를 키울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처럼 진짜 아기를 키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애착 실험은 사랑의 실체를 증명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떼어놓고 어미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한 채 키웠습니다. 그리고 교배시켜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밀쳐냈습니다. 새끼 때 자신을 안아준 어미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먼저 어머니의 젖이라는 따듯한 양식으로 전해집니다. 그 양식을 먹은 새끼는 자신도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어 어미처럼 할 수 있는 존재라 믿게 됩니다. 

옛날 일본의 한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귀족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는데 그 성 기둥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일본엔 기둥에 사람을 넣고 성을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이를 그 성에서 사무라이로 교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주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약속대로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사무라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서 밤에 도망치기로 합니다. 

몰래 성을 빠져나가던 중 어머니가 들어있다는 기둥을 만납니다. 그는 그 기둥을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는 기둥을 지나쳐 도망갈 수 없었고 그래서 끝까지 참아내어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가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계신 그 기둥에서 힘을 얻어 사무라이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는 죽었고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그를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아이가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머니의 피를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매일의 양식을 먹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바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에 맞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은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요한은 이처럼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겨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도망치다가 베텔(하느님의 집)이라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거기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봅니다.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다리의 양 기둥은 바로 희망을 상징하고 각 계단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그것을 나중에 에사우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 운명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조금이라도 동참이라도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계실 뿐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면 하늘뿐 아니라 땅에도 계시고, 성당에 뿐 아니라 술집에도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불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능성 또는 인간의 가능성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가능성을 자기 또는 인간의 가능성 안에 가두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넘는 것은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것은 마리아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믿으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쁜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마리아처럼 좋은 가능성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고, 이천 년 전에 한번이 아니라 지금도 오신다고,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사제와 우리에게도 오신다고, 베틀레헴의 구유뿐 아니라 미사 때 제대 위에도 오신다고 믿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려고 오시는 그 첫 번째 오심이 믿기 어렵지,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 매일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최후 만찬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그 천 번째 희생이 놀랍지 매일 당신 살과 피를 나눠주시는 것은 그 재현일 뿐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애송이가 아닌 우리에게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사는 것이 어렵지,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나를 다 내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만찬 때 우리가 읽는 복음은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의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의 뜻도 있고, 제자들의 배반을 아시고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당신을 전부 다 주시는 사랑을 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겸손과 사랑에 감탄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가자는 뜻으로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알고 주님도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 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살기를. 다 못살 바엔 아예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기를.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그대로 다 살지 못하더라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조금이라도 살고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사랑은 함께하는 식사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채워주십니다. 뜨거운 사랑 뜨거운 식사입니다. 모호한 하느님이 아니라 식사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체와 성혈이 지극한 사랑을 대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배고프거나 목마르길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목마르거나 허기지는 것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살아있음의 시간이 하느님의 생명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양식은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런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삶 안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살과 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식탁의 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 가득한 오늘이 펼쳐집니다. 주님의 식탁을 통해 사랑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사랑의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함께하는 식사로 살과 피가 됩니다. 한 몸이 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게하는 성체 성혈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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