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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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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2023년 6월 7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시편 25,1)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시편 25,1)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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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마르코 복음
12장 18-27절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7일 (수)
전호엽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3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7일 (수)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35

📌 강론시작 21:1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7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5

📌 강론시작 16:5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7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24

📌 미사시작 1:03:35

📌 강론시작 1:14:5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길

 

예수님 시대에 살던 대다수의 유다인들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유다 분파들 가운데 바리사이들과 에세네인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가이들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을 바탕으로(신명 25,5 참조) 매우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합니다. 일곱 형제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고 그 부인도 나중에 죽게 된다면, 부활 때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사두가이들의 관점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박은 이렇습니다.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혼인하는 일이 없기에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가 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자기 계시 속에 죽은 이들의 부활 개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잘못된 생각’(12,24.27 참조)을 드러내시면서 그들이 부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하느님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생각은 그분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더 잘 알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십니까? 솔직히 그동안 배운 것들과 내가 알고 있는 것들로 충분하다는 자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얕은 지식에만 기대어 하느님과 신앙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자기 방식대로 펼치다 보면, 실재하시는 하느님과 다른 허상을 그분으로 착각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길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쁜 삶 가운데에도 조금씩 시간을 내어 성경 읽기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성당, 피정의 집, 성지, 성체 조배실…. 이런 곳을 우리는 기도하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과 대화하고 만나는 곳으로 떠올립니다. 실제로 이런 곳이 도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더 쉽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런 곳에서만 계실까요? 
 
우리가 많이 바치는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당에만 계신 분도 아니고, 피정의 집이나 성지, 성체 조배실에만 계신 분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에는 안 계신다는 것일까요?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습니까? 물론 실내에 있으면 자기 눈에 하늘이 보일 리 없겠지만, 이 건물 위에도 하늘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가 잘 보입니다. 나의 시력 때문에 잘 안 보일 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순간에서도 계신 분이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만나려면,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매 순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두가이들은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지상의 삶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며, 하느님과 맺은 살아 있는 관계에 속하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것은 당시의 사람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살아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하느님을 세상의 논리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세상의 판단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한 원하는 참 행복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대의 행운의 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그 별이 있다. 불행은 자신의 별을 알지 못하기에 찾아온다.

- 발타사르 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산 자의 하느님, 죽은 자의 하느님.

 

오늘은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두가이들은 유대교 신봉자들이었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세적인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돈에 집중하기 위해 신이 자신들에게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은 있되 부활과 내세와 심판 등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내세가 있다는 말은 지금의 삶에 심판을 받아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혹시 내세에 있을 존재를 믿으면서도 그 존재의 영향은 전혀 받기 싫어하는 현시대의 사두가이들은 없을까요? 

유튜브 채널 ‘MBN, 특종세상’에서 ‘빗물을 마시고 풀을 뜯어 먹는 할머니’란 사연이 방송되었습니다. 여기 나온 할머니는 몸도 불편하시면서 지붕에 올라 주워온 것들을 올려놓고 집 안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채우며 주위에 피해를 주며 살고 계셨습니다. 이장이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문을 쇠사슬로 걸어잠그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포기한 상태입니다. 

할머니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막내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쇠약해서 1년 반 동안 매일 같이 절에 가서 기도하고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 딸이 지금의 할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할머니는 결혼도 안 하고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상실감에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심경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살아있는 어머니일까요, 죽은 어머니일까요?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죽은 자들의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더는 할머니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아무리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 위해서 기도 드려도 할머니의 어머니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 가셨다면 지금 살아있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어머니는 딸이 그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딸은 어머니를 보내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죽은 자들의 동네로 보내버렸고 자신은 어머니의 체취가 묻은 집만을 살아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죽음으로 그분을 그렇게 완전히 보내버렸다면 그분은 실제로는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필요하게만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신다면 나는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죽은 자들의 하느님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죽은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믿습니다. 

‘우아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달리는 상훈 씨의 사연이 있습니다. 90도로 꺾인 다리로 전북 장애인 육상 선수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어머니를 위해 달린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았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에게 어머니는 죽었던 살았던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살아있는 자입니다. 

결국 우리가 죽어서 만나게 될 분이 하느님이신지, 아닌지 그 준비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덕분으로 삽니다. 죽어도 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그래서 나도 죽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두가이처럼 되지 말고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을 믿읍시다. 그 증거는 그분 때문에 내가 점점 더 그분 뜻에 맞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삶입니다. 이 세상은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탄식이 기도가 되는

 

어제 저의 강론을 오늘 돌아보니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어제 토빗을 완성형 인간으로 그리고 참되고 완전한 선행의 본보기와 행복한 선행의 본보기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요지부동의 선행과 요지부동의 행복이었지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란 흔들어대도 부동 곧 끄떡없음을 말함이지요. 이것은 안빈낙도(安貧樂道)처럼 수행을 통해 도사 또는 완전의 경지에 올라 아무리 누가 흔들어대도 그 사랑과 행복이 끄떡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돌아보니 거기에 하느님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으로 제가 토빗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토빗은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욕에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고, 하느님께 울며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선행의 대가가 이런 거라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탄식이 독백이 아니라는 점이고 탄식이 향하는 곳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점입니다. 

이 인간에게 모욕당하고 저 인간에게 하소연하는 식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탄식하고 그래서 탄식이 기도가 되는 그런 식입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형제와 살다가 죽은 여인이 저세상에서는 누구의 부인이 될 것인지 사두가이들이 묻고 주님께서 답하시는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주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의 천사와 같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토빗기와 주님의 대답을 연결하여 묵상하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천사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재편이 저세상에서는 있게 되고, 완전히 하느님 중심의 관계로 재편될 것이며, 그래서 다시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지금부터 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초인으로 살지 않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필요 없는 초인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천사처럼, 탄식이 기도가 되는 천사처럼 살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운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이 시간을 서로 함께 더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이라는 사랑의 주제를 벗어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닌 온전히 열려있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 오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놓치지 않고 사랑을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 복음의 참된 기쁨입니다. 살아있음이 아닌 죽음과 아직 오지 않은 가정법에 길들여진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결혼도 수도생활도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한 사랑의 여정입니다. 

오늘을 나누어 먹는 관계가 살아있는 부활의 시간입니다. 찢어져 버린 관계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갈팡질팡하는 관계가 아닌 믿음의 관계가 함께 걸어가는 관계입니다. 앞서가지 않는 인생의 동행과 동반의 보폭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는 보폭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오늘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처럼 혼인도 수도생활도 서로를 속이지 않는 진실한 사랑으로 익어갑니다. 

오늘도 같은 마음으로 아름답게 익어가는 사람과 사람의 소중한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살아있는 부활의 기쁨도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사랑과 믿음 감사의 시간임을 이제야 알게됩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나누시는 참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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