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4.
반응형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를 인간에게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참신앙으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알고 오직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4일 (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코린토2서 성경 말씀 카드

기뻐하십시오. (2코린 13,11)

 

기뻐하십시오. (2코린 13,11) 코린토2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34,4ㄱㄷ-6.8-9)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 제2독서
    (코린토2서 13,11-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

  • 오늘 복음
    (요한 3,16-18)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받으소서.

 

 

요한 복음
3장 16-18절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4일 (일)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 집전

 

📌 삼위일체 대축일 소개 00:05

📌 속초 동명동 파티마 성당 소개 01:06

📌 미사시작 02:58

📌 강론시작 16:2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4일 (일)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51

📌 강론시작 16:0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4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25

📌 강론시작 12:5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삼위의 일치와 사랑으로 현존하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만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그 놀라운 신비에 조금이나마 다가가 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세상은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악에 물들어 버렸지만, 성부께서는 그런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과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을(1,18 참조), 당신과 하나이신 분을(10,30 참조) 보내시어 그분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아버지에게서 세상에 파견되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펼치신 모든 활동이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 주시고,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해방하시며, 마지막에는 스스로 속죄 제물이 되시어 그 희생 제사로 인류가 성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4,16). 

성령의 파견은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 방식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뿐만 아니라 성령까지도 보내시어 그야말로 당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어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파견된 “진리의 영”(14,17)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성자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들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서로 친교를 이루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삼위께서 서로 나누시는 사랑은 고스란히 인류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을 받게 된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요한 13,34 참조) 실천하며 삼위일체를 닮은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미사를 시작하며 나누는 인사를 떠올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삼위일체의 신비

 

샤를 드 푸코 성인은 어느 날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늦가을이어서 나무에 떨어지는 잎사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떨어지는 잎에 대해 염려하거나 안달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은 자신을 나무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보며 성인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나무와 인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나 인간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무보다 못한 삶이 아닌, 나무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떨어져 나가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떨어져 나가는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성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연결만 되어 있으면 생명을 잃지 않게 됩니다.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하느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당신께로부터 떨어지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진정으로 당신 안에서 하나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약한 심정들이 주님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께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본질이 같으시고, 유일한 실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라는 것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는 세 위격의 신비는 우리 역시 주님과 하나를 이루어 가면서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사랑의 신비였으며, 겸손의 신비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 덕분에 우리도 사랑을 본받아 주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를 이룬 사람이 나의 이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그들 역시 주님 안에서 함께 하나를 이루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또 다른 ‘하나’를 만들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 삶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을 잘 이해하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들을 판단하는 데 절대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 생트 뵈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삼위일체를 모르면 사랑도 모른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가난한 남편은 가보로 내려오는 손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해 머리빗을 삽니다. 아내는 자기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장만합니다. 그리고 성탄절 이브에 서로 선물을 교환할 때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분명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가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1,27)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복수성은 이렇듯 성경대로라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 안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관계는 ‘나-선물-너’의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선물 안에는 나의 존재가 들어갑니다. 내가 어떤 선물을 누군가에게 주었는데 그 사람이 그 선물을 하찮게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리면 나는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을 것입니다. 내가 마치 그 선물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기분이 느껴질 것입니다. 

내가 선물은 아니지만 그 선물 안에는 나도 어느 정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상대도 나에게 선물하게 하는 힘을 지닙니다. ‘나’가 하느님 아버지시라면 ‘너’는 성자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있는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선물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나(1), 너(2), 선물(3)의 세 조건이 갖춰져야 관계가 맺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바닷물을 조개껍데기로 자신이 판 웅덩이에 붓고 있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머리에 퍼 담으려고 하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 아니겠습니까?”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느님 삼위일체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되지만, 더 긍정적으로는 인간의 작은 머리에도 어느 정도는 담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짠 것을 알면 전체 바닷물도 짤 것이란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는 아닐지라도 삼위일체 사랑의 법칙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이해하기 위해 바닷물로 채워야 하는 웅덩이는 남녀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홀어머니에게서 자라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떻게 사랑해주는지, 또 어머니가 아버지께 어떻게 사랑에 보답하는지를 보지 못했다면 그 아이는 어디에서건 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를 보고 배워야만 합니다. 

아이가 늑대에게 키워져서 본인이 늑대의 사랑을 받고 늑대인 줄 알고 그래서 늑대가 사랑하는 방식만을 추구한다면 인간 사회에서는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인 줄 알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그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사랑이 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삼위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하느님, 곧 ‘한 본성의 삼위’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합니다.”(CCC, 253) 삼위일체 신비에서 가장 중요한 세 단어는 ‘본성’(natura), ‘위격’(persona), ‘관계’(relatio)입니다. 위격은 ‘분’이라는 말과 같은데 ‘삼위’는 ‘세 분’이란 뜻입니다.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면 일신론 이단이 됩니다. 그리고 나와 너, 그리고 선물이 있어야 합니다. 

선물은 ‘관계’의 기본입니다. 서로 자신을 내어주어 선물이 되지 않으면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위일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은 하나여야 합니다. ‘한 하느님’이 되신다는 말이 삼위일체란 말의 ‘일체’입니다. 세 분이 마치 나이 든 하느님 아버지, 젊은 예수님, 비둘기의 성령을 ‘동시에’ 그림에 그려놓은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도 이단입니다. 그 안에서는 신성이 셋이 되어 한 본성이어야 하는 교리에 어긋납니다. 

창조는 이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나오는 ‘은총과 진리’로 이뤄집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설계도와 땀이 필요합니다. 땀이 은총이고 설계도가 진리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신이 부모와 같은 본성임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때 찾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진리입니다.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을 보고 자신도 그 사랑을 본받아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느님 삼위일체의 모델을 기반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지 다른 사랑의 모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함이 사랑을 이해함임을 잊지 말고 내가 맺는 모든 관계가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 곧 삼위일체만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을 믿겠습니다 .

 

지난주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교회는 바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오심으로 삼위일체가 비로서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인데,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우리가 비로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 전까지 주님의 직제자들조차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성령께서 오심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가 알고 믿는 데 결정적입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그런 믿음에 머물러 있거나 아예 하느님조차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주 분명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부정하는 유대교를 우리가 왜 믿겠습니까? 그 잘난 체나 하고 자기들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그 종교와 그 하느님을 아시아에 있는 우리가 왜 믿겠습니까? 

저는 진정 불교를 사랑하고, 유교와 노자와 장자의 사상도 매우 사랑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교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게 하고 믿게 하신 것이 성령이십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우리를 삼위일체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 믿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아니시라면, 사랑이시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필요 없고 그리스도교를 믿을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도 훌륭하고 유교와 노장사상도 훌륭하고, 어쩌면 동양인인 우리에게 더 잘 맞기에 굳이 그리스도교를 믿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이제 확고합니다. 가르침만 주는 종교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도록 인도하는 종교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스승과 부모가 있다면 스승을 따라가지 않고, 부모를 따라가듯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우릴 너무도 사랑하시어 성자를 주셨다고 오늘 복음은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유대인처럼 믿지 못한다면 해가 떠도 그 빛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이 비 구원이고 불행이고 단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은 구원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진수성찬이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그것은 행복이 될 것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있습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그것은 치유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것은 행복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과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불행이고 비 구원입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관건은 그것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그것입니다. 

저라면 사랑을 믿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믿지 않고, 저를 미워하신다는 것은 더더욱 믿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받아주시고 내어주시고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운 신비를 체험합니다. 사랑과 생명 신앙은 모두 하느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서로를 믿고 고백하며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충만한 사랑의 친교 없이는 우리또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작용은 이렇듯이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공동체로 계시고 형제적 사랑으로 계시고 가족으로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참되고 다양하고 서로 구별되는 사랑의 위격을 지니셨습니다. 성부도 사랑이시고 성자도 사랑이시고 성령도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은 서로의 고유한 모습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일치하는 기쁨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 함께하며 서로를 연결시켜 주며 서로를 결합시킵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은 세례의 탄생이며 내어주는 성사이며 하느님과 하나되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사랑은 일치이며 통합이며 충만함입니다. 사랑을 닮은 사랑의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가 맛본 하느님 사랑을 풍요롭게 나누고 받아들이고 내어주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로 생명과 사랑과 구원은 더욱 뜨거워 집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이 기쁨을 나누시는 오늘 되십시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