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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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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내 버팀목 되어 주셨네.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에, 넓은 들로 이끄시어 나를 구하셨네.

주님,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시고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2023년 6월 2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8주간 금요일

 

 

마르코 복음 성경 말씀 카드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마르 11,23)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마르 11,23) 마르코 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집회서 44,1.9-13)
    우리의 선조들은 자비로워 그 이름이 대대로 살아 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1,11-25)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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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마르코 복음
11장 11-25절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2일 (금)
이경수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6월 교황님의 기도 지향 00:23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6:1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2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06

📌 강론시작 13:4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53

📌 강론시작 13:0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2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46

📌 미사시작 1:03:11

📌 강론시작 1:09:4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새로운 성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꽤 당혹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시고 거기에서 허기를 채울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러나 아무 열매도 없다는 사실에 곧바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시장하셨다고 하여도 너무 매정하게 보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사실 이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장면과 그 저주가 이루어지는 장면 사이에 의도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야기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두 이야기를 연결 지어 생각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게 됩니다. 당대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제구실을 못 하는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 이해 당사자들과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그곳을 ‘기도의 집’이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구원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곧 구원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 버린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게 된 우리 자신이, 곧 우리의 몸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새로운 성전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습니까? 혹시 환전상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자들이 새 성전의 뜰에도 여전히 넘쳐 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갖 세속적인 생각들이 우리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새 성전이 된 우리는 열매 맺는 무화과나무여야 합니다. 혹시 열매가 열렸을까 다가오시는 분께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20년 조사를 보니 기아 인구가 전 세계에 자그마치 8억 1천만 명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인구 5명당 1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제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 옷을 나누어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고만 청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어려움마저 해결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하느님의 도구답게 살고 있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데, “제가 바빠서요.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저한테 뭐 해 준 것이 있나요?” 등의 말을 하면서 손이 되기를,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께서 마침 길가에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십니다. 그 열매는 시장기를 끄기에는 충분치 않았겠지만, 허기를 잠재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기대했는데,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열리는 과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가갔을 때 그 잎이 무성했다면 이미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열매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이지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도 열매 맺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원하셔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인데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계속 의심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으며 자신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멋지고 빼어난 것들 때문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다.

- 허지웅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례의 목적, 전례의 열매.

 

오늘 복음은 전례가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하는지 밝혀줍니다.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고 그 다음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장면이며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가 왜 뿌리째 말라 죽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서술 방법을 대칭구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이스라엘 성전 전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돈을 좋아하게 될 때 본래의 전례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전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특별히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게 해 달라고 청하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마지막으로 심어주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전례는 서로 돈을 좋아하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온전한 전례가 이루어지는 성당은 서로 사랑하고 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했지만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던 것입니다

사랑과 관련된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 받았다면 나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기 싫고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브라디가 수녀님을 만나서 용서를 하고 싶고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처럼 전례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는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으로 아무도 없게 하겠다는 결심이 생겨야 전례에 온전히 참여한 것입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99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지구의 밍고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형제와 자매 중 장남인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말랄라의 아버지인 지아우딘 유사프자이는 교육 활동가이자 학교 소유주로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하는 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말랄라의 삶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봉사하여 그녀에게 교육에 대한 사랑과 학습할 권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교육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지아우딘은 탈레반의 행동에 반대하며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공개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말랄라 자신의 행동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8년 말랄라가 겨우 11살이었을 때 그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어떻게 탈레반이 교육에 대한 기본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로 말랄라는 BBC에 익명의 블로그를 쓰기 시작하여 소녀들의 학교 출석을 금지한 탈레반 치하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2012년 10월, 당시 15세였던 말랄라는 그녀의 행동주의와 유명세 때문에 탈레반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한 탈레반이 그녀의 학교 버스에 올라타 그녀의 이름을 묻고 그녀의 머리에 총을 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파키스탄에서 초기 치료를 받은 후 치료를 위해 영국 버밍엄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말랄라는 이 잔인한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그녀를 침묵시키는 대신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는 그녀의 결심을 강화했습니다. 회복 후 그녀는 전 세계 소녀 교육을 옹호하면서 더욱 활기차게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2014년 17세의 말랄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맞서고 모든 어린이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말랄라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과 지원은 그녀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말하도록 격려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극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사회의 문화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지아우딘은 그의 딸을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있는 개인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딸과 여자들의 인권 성장을 위해 자신의 딸부터 날개를 꺾지 않았고 그것이 한 나라의 교육제도를 변화시키는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말랄라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불가능이 없다고 믿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없다는 내가 죽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하느님과의 만남인 미사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 전례도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세상 종말일 것입니다. 용서와 능력의 열매가 맺히는 전례가 되도록 힘씁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저주받은 나무와 축복받은 나무.

 

오늘 주님 모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분이 과연 주님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당신이 시장하신데 열매 맺지 않았다고 죽으라고 저주하시고, 성전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난폭하게 쫓아내십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 맞습니까?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이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분명 시험하고, 주님의 이런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많이 생각게 합니다. 

우선 주님은 우리처럼 당신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이러신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어야 하고, 더 나아가 이런 충격적인 방식을 통해 가르침 주시려고 이러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약 아무도 없이 당신 혼자셨다면 이러셨을까 우선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라고 분명히 얘기하는데 이를 보면 제자들이 들으라고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선 성전의 주인도 주님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도 주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천명하시고 알게 하시려고 이리하신 것일 겁니다. 

두 번째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나 성전은 이런 운명이 될 거라는 경고의 뜻으로 이렇게 하신 것일 겁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주인이 베라고 하시자 나무 재배인이 주인에게 정성을 들여 더 가꿀 테니 한 해만 말미를 달라고 할 것이라는 비유를 주님께서 들려주시는데 여기서 나무 재배인은 주님이시지요. 

그러므로 복음서 전체적으로 볼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없어질 운명이지만 주님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도록 정성을 들이는 분이시고, 정성을 들이셨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도 어쩔 수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열매를 맺기를 원하실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회개의 열매란 어떤 열매입니까? 사랑이고 선행일 것이고, 사랑과 선행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까? 지금 우리로 치면 우리의 성당들은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꾼과 도둑들이 설치는 곳이었고 그래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 성당이나 공동체도 주님 사랑을 나누는 성전이 아니라 자기들의 물건을 사고팔고 이익이나 나누는 곳이라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고 주님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우리 개인도 열매 맺는 나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자들이란 회개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그러면 오늘 복음의 나무처럼 저주받지 않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며 자신들의 육신을 그 악습과 죄와 더불어 미워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 오, 그런 일을 실천하고 그런 일에 항구하는 남녀들은 얼마나 복되고 축복받은 사람들인지!” 

주님께서는 불행해지라고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치 않으면 불행해질 거라고 경고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혹여 저주나 경고나 받고 축복은 받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기도로 아침이 열립니다. 기도가 중심이 되는 기도의 집입니다. 매일의 삶이 기도이며 기도는 우리의 매순간이 됩니다. 회개의 삶이 바로 기도의 집이 됩니다. 회개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열매입니다. 기도처럼 열매도 알차게 자라납니다. 세상은 기도를 통해 더욱 따뜻하여 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길을 잃게 되는 신앙인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멀리 계신 하느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 되십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의 편이 됩니다. 기도가 기도를 위로합니다. 기도가 예수님처럼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기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맑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고 기도로 이겨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기도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기도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기도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공동체를 맡깁니다.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시는 주님께서 기도의 열매를 다시 맺어 주십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고받는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기도의 집은 강도들의 소굴이 아닙니다. 기도의 집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아름다워집니다. 기도의 열매는 용서와 사랑 감사와 이루어짐의 열매입니다. 기도를 믿고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따릅니다. 기도의 집은 기도의 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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