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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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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저들, 그 교만한 자들이 저를 잡으려 구렁을 팠나이다. 그러나 저는 임금들 앞에서 당신의 법을 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하느님, 복된 순교자 유스티노에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지혜를 깊이 깨닫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그릇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참된 믿음을 굳게 지켜 나가게 하소서.

 

2023년 6월 1일 (목)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마르코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집회서 42,15-25)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0,46ㄴ-52)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마르코 복음
10,46ㄴ장 52절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일 (목)
박재찬 안셀모 신부 집전

 

📌 성 유스티노 순교자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0

📌 강론시작 09:0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일 (목)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57

📌 강론시작 17:0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1

📌 강론시작 07:5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우리의 눈은 온전히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까?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8,27—10,52 참조)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설득하십니다. 메시아로서 걸어야 할 수난의 길을 여러 차례 예고하시고, 제자들도 그런 메시아를 따라 십자가의 길, 곧 스스로 낮아지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기도 하고(9,33-34 참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옆자리를 탐내기도 합니다(10,35-37 참조).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은 이 여정의 마지막 이야기에서야 발견되는데(오늘 복음 참조), 그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곁에 머물던 제자들에게서 드러나지 않고 예리코 성읍 길가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바르티매오의 세 가지 모습에서 참된 제자 상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잠자코 있으라는 주변의 꾸짖음에도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자비를 구하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함은 결국 예수님의 부르심을 이끌어 냅니다. 

둘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향합니다. 여기서 겉옷은 거지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바라보려는 원의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마주하였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는 물음에 거지로서 돈 몇 푼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바랐던 것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시력을 되찾은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두 눈에 예수님을 담고 곧장 그분을 따라 길을 나서는 참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간절하게 구원을 바라고 또 그것을 청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눈은 온전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그분을 향하고 있습니까?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에게서 참된 제자의 모습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가능성 열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지각과 해석의 차이를 설명했던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림을 한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오리로 보이고 또 얼핏 보면 토끼로 보이는 그림입니다. 또 루빈의 꽃병이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이 역시 꽃병이 보이면서 동시에 마주 보는 두 사람이 보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나의 형상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가능성만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가능성을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진실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하느님은 나약한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눈에 꼭 보이는 것만이 진실일까요? 산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산소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숨을 쉬고 있는 것만 봐도 분명히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험 등을 통해 증거와 증명을 찾는 과학자들 사이에 무신론자가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자 중에서 신의 존재를 굳게 믿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가능성의 장을 열어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증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유신론자가 많다고 하더군요. 
 
가능성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을 찾기란 더 힘들어집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하느님을 만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의 반응은 곧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로 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이에 바르티메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외쳤던, ‘다윗의 자손 예수님, 스승님’은 모두 주님을 향한 믿음의 호칭입니다. 이 믿음이 그의 어두움을 걷어내고 빛을 보게 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단순히 ‘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눈을 뜨는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 가능성이 그에게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마르 10,52 참조). 참 빛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가 낙담해서 문 찾기를 그만두려 할 때 거짓말처럼 문은 열린다.

- 마르셀 프루스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

 

오늘 복음은 바르티매오의 얘기로서 너무 감동적입니다. 

그는 본래 보던 사람이었는데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자비를 열렬히 주님께 청하였고 그래서 주님께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입 다물라고 했는데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는 그 자비 열망이 너무 감동적이고 그래서 자비를 입은 것이 본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더 감동적인 것은 자비를 입고 난 뒤 그것으로 ‘땡’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자기 눈이 멀쩡해지고 불편함이 없어진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눈으로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복음 묵상은 이 정도로 나누고 집회서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집회서는 너무 장대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과 신앙을 넓게 성찰케 합니다. 우선 첫 말씀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성찰케 하고 반성케 합니다.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묘사하리라.” 

우리는 나의 업적을 기억하고 그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장광설을 펼치는데 집회서 저자는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묘사하겠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업적 앞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 업적은 업적도 아니잖습니까? 

다음 말씀은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입니다. 우리의 업적이라는 것이 보잘것없지만 그 보잘것없는 업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갖은 애를 쓰는데 주님은 당신 말씀으로 그것도 한 말씀으로 당신 업적을 이루십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의 치유를 부탁하면서 주님 친히 자기 집에 오실 필요 없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 하였는데 이렇듯이 주님은 한 말씀으로 모든 걸 이루시지만 우리는 갖은 애를 써도 업적이랄 것이 못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정은 악의에서 나오기 십상이고, 선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불순물처럼 있기 십상입니다. 온전히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선의가 아닐 때 위선이나 자기 성취나 만족과 같은 불순물이 선의에 섞여 있기 마련이지요. 

이어서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온갖 통찰력을 갖추시고 시대의 표징을 살피신다.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일컬어 통찰력이 있다고 하고, 저도 성향상 다른 사람에 비해 직관이나 통찰력이 있는 편이라고 얘기되는데 그렇다고 한들 하느님께 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을 다 알지 못하는데 그분은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그래서 우리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닿습니다.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한다.” 

하느님은 이러하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곧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짝을 이루도록 우리 인간을 만드셨고, 혼자서 완전하지 않고 합하여 완전하도록 만드셨는데, 우리는 종종 마주하는 것은 불편하다, 혼자 있는 것이 편타 하고 혼자서 완전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는데 서로 돋보이게 하지 않고, 자기가 돋보이고, 자기만 돋보이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곤 하기에 서로를 망가트립니다. 그러니 이제 누굴 만나든 둘이서 완전해지는 짝으로 마주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땅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가 울려 퍼집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이해 관계로 얽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랑과 무관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열리지 않고서는 소중한 것을 다시 볼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예수 성심 성월의 첫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아주십니다. 악습의 가면을 벗겨 주십니다. 지켜야 할 사랑을 다시 보게 하십니다. 다시 보아야 기억해 낼 수 있고 다시 보아야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푸르고 깨끗한 유월의 이 모든 것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다시 보아야 제대로 건져 올릴 수 있는 사랑의 행복입니다.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주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예수님의 시각이 됩니다. 다시 볼 수 있는 오늘 다시 볼 수 있는 소중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뜨겁게 만나는 사랑의 오늘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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