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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0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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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인은 하느님의 법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으며, 악인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는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었네.

주님, 거룩한 순교자 보니파시오의 전구를 들으시어 그가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행동으로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2023년 6월 5일 (월)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복음 성경 말씀 카드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르코복음 12,11)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르코복음 12,11) 마르코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토빗기 1,3; 2,1ㄴ-8)
    토빗은 진리의 길을 걸어왔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2,1-12)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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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셨네.

 

 

마르코 복음
12장 1-12절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5일 (월)
김대용 바실리오 신부 집전

 

📌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소개 00:05

📌 교황님의 6월 기도지향 01:09

📌 미사시작 01:24

📌 강론시작 08:3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5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5

📌 강론시작 17:0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5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28

📌 강론시작 13:1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5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39

📌 미사시작 1:00:45

📌 강론시작 1:09:5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바로 앞 단락에서(지난 토요일 복음 참조)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한 유다 지도자들에게 당신께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계시하시면서 그들이 문제 삼은 권한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주인은 그 밭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여기서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을, 그리고 포도밭의 관리를 맡은 소작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주인은 자기 포도밭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게서 끊임없이 파견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종들은 소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매질이나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머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종들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많은 예언자가 겪어야 하였던 수난의 역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이전에 파견된 예언자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주인이 파견하는 마지막 인물은 ‘종’이 아니라 ‘아들’로 표현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하나뿐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계신 분, 하느님과 유일하고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는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며 예수님께서 어떤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는지를 더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면, 우리 또한 그토록 귀하신 분을 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정성껏 모시며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내 아들이야 존중하여 주겠지.’ 하는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작인들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틀렸다”라고 말하는 내가 틀린 것.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타고르의 하인이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서 타고르의 속은 타들어 갔습니다. 2시간이 지나면서 타고르는 하인에게 어떤 벌을 줄지 온갖 궁리를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3시간이 지나자 더는 하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인을 곧바로 해고하리라고 결정한 것이지요. 
 
점심때가 되어서야 하인이 모습을 나타냈고, 하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밥을 짓고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타고르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런 고함 속에서도 계속 빗자루로 청소하던 하인이 잠시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어린 딸이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상대의 행동과 말을 보고서 무조건 잘못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과 행동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상대가 먼저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도 할 수 있지만, 타고르 하인의 경우처럼 너무 큰 슬픔에 말할 수 없는 상황도 될 수 있습니다. 
 
“틀렸다”라고 말하는 내가 틀린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틀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해의 마음으로 내가 먼저 말하고 먼저 행동해야 했습니다. 저 역시 참으로 많은 잘못된 판단으로 상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음을 반성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너무 큰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님께 제일 큰 상처를 드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을 다 일구어내고서 그 밭을 소작인에게 맡겼지만, 이 포도밭 소작인들은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처럼 생각하면서 소출을 받아 오라고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모욕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 소작인들의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정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장 기본은 사랑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특히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닌,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줄 은총과 사랑을 다른 이에게 넘겨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토빗은 평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와 선행의 길, 사랑의 길을 힘차게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상처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전하는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자신이 진실하지 않고 남이 자신에게 진실하길 바라는가?

-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야곱의 불콩죽이 에사우에게 한 일

 

오늘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결국 소작인들이 합당한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그 포도밭의 상속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인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것인데 그 방법이 소출의 일부를 봉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는 처음에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은 것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음이 결국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더 자세히는 야곱이 에사우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채는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야곱은 레베카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야곱의 장자권을 가로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콩죽은 왜 주어야 했을까요? 

불콩죽은 야곱의 입장에서는 장자권이 에사우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그 불콩죽을 먹고 자신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줄 수 있음을 인정해줍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축복을 빼앗겼을 때 에사우는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요? 

‘아, 그때 불콩죽을 먹고 장자권을 팔았어지!’

불콩죽은 야곱이 에사우가 상속권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였고, 그 불콩죽을 받아먹은 에사우는 그 불콩죽 덕분으로 상속권을 빼앗긴 것을 참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 소작인들이 내는 소출의 일부는 그 땅의 주인이 주인의 외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또 주인 입장에서는 아들에게 주어야 할 그 땅을 소출을 내는 동안 그 사람들에게 유예할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인은 착해서 아들이 죽어도 자신의 것으로 땅을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봉헌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그리스도에게만 유보된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인정하고 그 상속권을 우리에게 유예해 달라는 행위입니다. 그분이 상속자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그 인정한 불콩죽이 나의 영원한 기쁨으로 되돌아옵니다. 

2020년에 개봉한 성동일과 하지원 주연의 “담보”의 줄거리입니다. 성동일은 냉혹한 대출업자입니다. 불법 체류자인 아홉 살 서이를 둔 엄마는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동일은 아이를 잠시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담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서이 엄마는 경찰에 걸려 다시 중국으로 추방당합니다. 병이 든 서이 엄마는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잔혹한 대출업자이지만 서이에게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리고 서이가 나쁜 이들에게 팔려가고 이용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토바이로 택배 배달을 하며 서이를 키웁니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까지 서이 대학 졸업을 시키고 중국의 서이 엄마에게 서이를 돌려줍니다. 서이 엄마는 훌륭하게 성장한 서이를 보며 성동일에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헌은 이 영화의 ‘담보’와 같습니다. 봉헌은 나의 처지에서는 내가 드리지 않으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처지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는 하느님의 처지에서는 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만 하게 만드는 ‘독’과 같습니다. 물론 행복한 독입니다. 마치 아기의 웃음으로 부모가 자신들의 생명을 아이에게 내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지극한 사람에게 보내는 인정과 감사의 봉헌은 그 사랑 지극한 사람을 나를 위해 죽게 만들 힘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는다면 부모라도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일방적인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불콩죽도 내어주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취했다면 영화 ‘공공의 적’에서 자식은 보험금 때문에 키워준 부모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내가 바친 봉헌은 사랑스런 담보가 되어 그분의 생명까지도 내어주게 할 것입니다. 

자녀는 최소한이라도 내게 모든 것을 주시는 부모를 알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 받지만, 알아주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자녀에게 주고 싶지, 자신을 강탈하는 강도에게 내어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행에 관하여

 

“나 토빗은 평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다.” 

구약성서 중에 토빗기는 드물게 선행의 모범으로 토빗을 제시하는데 참 아름답기는 하지만 토빗과 같은 삶을 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토빗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그것도 평생 이런 삶을 살고 싶습니까? 

저의 경우 한때 이런 삶을 살았던 적이 있고 또 살고 싶기도 하지만 살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선행을 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분명합니다.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그 안에 악만 가득 차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에 비해 선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선과 사랑으로 충만하기에 그런 것이니 분명 행복하지요. 

그렇습니다. 선행은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행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자기 행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했을 때 아니, 선행을 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사랑이 내 안에 스며들고 행복감이 내 안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또 하고 또 하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저는 선행의 중매를 많이 하는 편이고, 어제도 그런 중매를 했지요. 한국에 유학을 온 친구들이 영어도 배우고 싶어 하는데 마침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이들을 엮어 줬지요. 

그런데 이런 중매쟁이 짓을 하고 가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선행을 밀어붙인 것이 아닌가? 한두 번은 큰 무리가 없지만, 매주 봉사는 무리가 안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중매가 그 친구를 매주 행복하게 할까, 매주 부담이 될까 걱정된 것이지요. 

실제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여기 밥상의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분이 많지 않고 그래서 꾸준한 분들을 보면 정말 고맙고 정말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토빗은 자기 생일잔치에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주님께서 선행을 하되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라 하신 바로 그대로지요. 저 같으면 제 생일잔치에 제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해 저의 생일잔치가 유쾌한 자리가 되기를 바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자리를 망치는 불청객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과거 그런 경험이 있지요.,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식사하는데 곤궁한 분들이 껌을 가지고 와 사달라고 하면 순간 즐거웠던 분위기가 잠시 싸해지는 경험 말입니다. 

그러니 토빗은 자기 생일잔치마저 즐거움이 아니라 사랑을 선택한 것이고, 즐거움의 행복이 아니라 희생의 행복이요 사랑의 행복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토빗은 희생의 행복을 넘어 위험한 행복도 선택합니다. 살해당한 동족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주는 선행을 한 것이고, 그로 인해 자기 재산이 몰수되고 쫓기게 되는 선행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위태로워지지만 자기의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없을 때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이지 자기 밖의 상황이 위태로울 때 행복이 위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겁니다. 

이런 강한 믿음, 확신이 있었기에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평생 선행을 멈추지 않고, 그 선행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는데, 그 아름다운 얘기를 우리는 이번 주 계속 따라가며 마음에 새기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소중한 하루의 일기(日記)를 봉헌하듯 이 하루를 이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폭력을 멈추는 것이 기도이며 평화입니다. 너무 자주 소중한 관계 마저 없애고 깨뜨려 버리는 끔찍한 우리자신입니다. 거두어들이는 욕심보다 내려놓는 겸손이 더 필요한 우리 여정입니다. 

욕심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할 은총의 시간들이 가득 펼쳐집니다. 하느님 마저 소유하고 하느님 마저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 내면이 위험수위를 이미 넘었습니다. 의미 있는 시간은 새로워지는 시간이며 사랑을 다하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길의 모색은 사랑과 감사의 길로 우리 내면을 바꾸는 것입니다. 삶이 풀리지 않는 것은 헛된 욕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과 마음이 언제나 같이 걸어가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이제 탐내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고 빛나는 오늘을 주시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기쁨으로 바뀌면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선물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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