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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12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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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2023년 6월 12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8) 마태오 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코린토2서 1,1-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어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5,1-12ㄴ)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2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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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 복음
5장 1-12ㄴ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2일 (월)
이성규 대건안드레아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2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17

📌 강론시작 17:3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2일 (월)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12

📌 강론시작 10:3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2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4:41

📌 미사시작 1:03:03

📌 강론시작 1:11:4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진정한 행복

 

오늘부터 우리는 마태오 복음서에 실린 다섯 설교(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 참조)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산상 설교’(5—7장 참조)를 읽기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가 무려 세 장에 이르는 긴 분량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공생활 앞부분에 배치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설교가 중요하고 핵심적인 예수님 말씀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고자 산으로 오르시는 장면(5,1 참조)과,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8,1 참조)은 이 설교의 전체적인 틀을 이룹니다. 

여기서 산은 하느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구약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였듯이, 예수님께서도 산 위에서 군중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하는데,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율법, 곧 하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준비하는 종말론적 가르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설교의 시작으로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선포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같은 형식으로 구성된 여덟 개의 행복 선언(“행복하여라” + 행복의 주체 + 행복의 이유), 그리고 조금 다른 형식을 보이는 마지막 선언까지 모두 아홉 가지의 행복을 전합니다. 이 단락의 핵심은 참행복이 하느님의 구원, 곧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행복과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주체들은 역설적으로 행복하여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 곧 세속의 관점에서 무언가 결핍되고 불행하여 보이는 이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의 위로를 받고, 땅을 차지하며,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자녀라 불리며 하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장엄하게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하늘 나라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가운데,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늘 자기 마음을 정화하며, 분열이 아닌 일치와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면,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하늘 나라를 소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해결책은 자기 안에 있다.

 

살아가며 마주치는 세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 자신과의 문제.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문제. 
 
셋째는 사물, 사건(일)과의 문제. 
 

이 세 가지 문제로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하면 이 문제들의 해결책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먼저 나 자신과의 문제는 자기 조절력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대인 관계력을 키워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물과 사건(일)과의 문제는 지기 동기력(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힘)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해결책은 자기 안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안에 있는 그 해결책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해결책이 외부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상황이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고 그래야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일들이 언제나 내 뜻대로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기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평불만이 등장하면서 자기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행복과 불행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박해받는 이들이 현실 속에서 행복해 보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을 생각하고, 사람들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좇으며 세속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분명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불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도, 남들이 자신을 그 자리로 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문제보다 외부 상황의 문제만을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느님이심을 깨닫는 이들은 현실에서 겪는 일들에 집착하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찾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한 사람이 자기만의 개성을 얻는 것도, 그것을 발휘하는 것도 전부 유대를 통해서다.

- 존 듀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행복 : 존재 가치 상승 욕구의 충족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수학 강사는 “강남 아파트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대, 절대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왠지 약을 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진심이 묻어납니다. 40~50억짜리 한강 경치가 보이는 강남 아파트에 아마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일 행복할 때는 아파트를 사기 위해 처음 갔을 때. 그다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잔금을 낼 때. 막상 들어가 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더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무엇이든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구도 80이 젤 재밌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임영웅, BTS 절대 행복하지 않아. 올라갈 데가 없으니까. 대학도 마찬가지야.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다음부터는 행복하지 않아. 그 안에 갇혀버린 거니까. 더 갈 곳이 없어.”

이 말 안에서 ‘희망’이 행복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끊임없이 희망해야 하고 그 희망이 끊임없이 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결코 완전히 달성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 명예, 쾌락입니까? 사실 그런 모든 욕망을 아우르는 욕망이 하나 있습니다. 

‘존재 상승 욕구’

그냥 인정받으려는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강남 아파트를 살 때 처음 그 집을 보았을 때, 그리고 잔금을 치를 때 느끼는 맛은 ‘내가 이런 사람이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존재 상승 욕구가 있고 그것이 충족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 돈이 있는 것을 자랑할까요? 그것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존재 상승 욕구를 추구하는 우리는 모두 두 종류로 나뉩니다. 나의 창조자, 부모를 닮아가며 존재 상승의 기쁨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소유와 경쟁을 통해 타인보다 높은 존재임을 증명받으려는 사람입니다. 이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비가 되어 존재가 상승하려는 노랑 애벌레와 애벌레 기둥을 기어올라 더 높아지려는 줄무늬 애벌레의 차이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경쟁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신학교에 늦게나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존재가 향상됨이 자주 느껴지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예수님 가르침의 시작이고 첫 주제는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해지는 방법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려고 해야 하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도 받아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면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부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과정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당신을 닮아가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이전의 세속-육신-마귀의 행복을 좇던 것에서 지금은 주님을 닮는 것이 목적이니 마음이 조금은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을 때보다 분명 행복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아기보다 어머니가 행복한 것처럼 그래도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더 행복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화가 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다 주님 뜻이라 여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내가 죽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려고 했고 조금씩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는 것도 행복입니다.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사실 박해도 없지 않은데, 가장 짜릿한 이상한 행복이 그때 옵니다. 그리스도와 매우 닮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감의 과정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되기에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또한 끝이 아니기에 행복이 거기서 멈추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은 부모를 닮아감입니다. 더는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을 때 행복을 잃습니다. 부모처럼 말을 하고 부모처럼 두 발로 걸으며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물 위를 걸은 베드로는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튜브에 보니 아기가 처음 “엄마!”라는 말을 했을 때 엄마가 기뻐서 계속 “엄마, 엄마, 엄마?”라고 하고 그러면 아기도 “엄마, 음마, 암마…”라고 하며 웃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엄마도 기쁘고 아기도 기쁩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일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가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나의 변화하는 모습을 행복의 이유로 삼아봅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재미를 들여봅시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 행복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든 위로의 하느님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남이 잘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남이 잘못되었을 때 위로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 위로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위로치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자기도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아닙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위로를 더 잘합니다. 서로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울어짐 없이 서로 위로합니다. 

그러니까 위로를 할 수 없는 사람은 동병상련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해서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너무도 부족함이나 어려움 없이 자라서 위로받을 일이 없었던 거지요. 배고픈 적이 없는 사람은 ‘배고프다는 것이 뭐야?’하고 의아해하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위로가 정말 필요한 사람인데 위로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 위로는커녕 질책이나 꾸중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위로도 꾸중도 다 차단하고 무통증 환자처럼 삽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무통증인 것이 아니라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통증이고 그래서 남을 위로할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위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지 못해 위로할 줄 모르는 것. 하느님은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 위로를 찾지 않고, 받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위로의 하느님인데 왜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까? 조금 궤변 같지만 제 생각에 모든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일부 위로, 어떤 위로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애정 결핍증 환자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어떤 사람의 위로만 받고 싶고 그래서 그에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위로는 원치도 않고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여 마다합니다. 왜냐면 위로받고 싶은 그 특별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해준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가 아니라 그의 위로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시는데 그 특별한 위로만을 원하니 다른 모든 위로는 위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모든 선이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모든 위로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퍼하는 사람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위로일 것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역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위로를 하느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난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가난한 마음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하신 마음이 우리의 아픈 마음을 돌보십니다. 

하나되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하느님께 열려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을 늘 응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위해 마음을 먼저 이야기하십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참된 행복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생기는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과 함께 행복이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과 행복 그리고 하늘 나라는 하나입니다. 마음 없는 행복이 있을 수 없듯 회개 없는 하늘 나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마음을 향하고 마음은 마음의 사람을 향하듯 마음의 사람은 하늘 나라를 향합니다. 가난해야 할 우리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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