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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6/10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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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2023년 6월 10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9주간 토요일

 

 

토빗기 성경 말씀 카드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토빗 12,20)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토빗 12,20) 토빗기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토빗기 12,1.5-15.20)
    이제 주님을 찬미하여라. 자, 나는 하느님께 올라간다.

  • 오늘 복음
    (마르코 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6월 10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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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르코 복음
12장 38-44절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0일 (토)
전호엽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0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05

📌 강론시작 15:2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0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29

📌 강론시작 12:3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0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33

📌 미사시작 1:01:40

📌 강론시작 1:10: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내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헌금 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많은 부자가 찾아와 큰돈을 넣는 모습도 보시고, 가난한 과부가 찾아와 렙톤 두 닢, 곧 콰드란스 한 닢에 지나지 않는 적은 돈을 넣는 모습도 보십니다. 

콰드란스는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단위로, 값어치가 가장 낮은 로마 화폐였습니다. 부자들 ‘다수’에 대비되는 가난한 과부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봉헌한 ‘거액’과 ‘소액’의 대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 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 말씀은 많은 돈을 기부한 부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보다도 — 더 많은 돈을 넣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부자들이 기부한 모든 돈을 합친 금액보다 그 과부가 더 많은 돈을 넣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콰드란스 한 닢과는 견주지도 못할 엄청난 금액일 텐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왜곡된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신 부분은 봉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봉헌하는 정황입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활비로 옮긴 그리스 말 ‘비오스’의 본뜻은 ‘생명’입니다. 과부는 자신의 온 생명을 봉헌한 것입니다. 넉넉한 가운데 얼마씩 봉헌하고도 남는 것이 있는 부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희생 제물로 내주신 예수님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과부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곳간에 쌓아 둔 소중한 것들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내드리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

 

예전에는 글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20년 넘게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곧바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생각을 돕는 것이 바로 일상의 단편들과 책 읽으면서 얻는 영감들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모합니다. 특히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할 때, 이 메모를 띄었다 붙이면서 구성하고 정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글을 완성합니다. 
 
누구는 일반 메모지를 사용하지, 왜 훨씬 비싼 포스트잇을 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포스트잇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잇은 적당한 접착력이 중요한데,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접착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접착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두 사용하기 위해 팍팍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포스트잇을 주신 분이 2016년 주님 곁으로 가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 연말에 마니또를 해서 선물을 나눴는데 그때 저의 마니또가 주교님이셨고, 제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포스트잇 뭉치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쓸 때마다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워낙 글을 잘 쓰셨던 주교님이시라 저 역시 글을 쓸 때 도움을 받는 것만 같습니다. 
 
본인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좋은 의미는 미소를 띠게 됩니다. 저 역시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를, 화를 내게 하는 의미가 아닌 기쁨을 주는 의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이웃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자랑하듯 큰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지요.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제물의 양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제물을 바치는 마음, 솔직함, 겸손함 등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부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봉헌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온 정성을 봉헌했습니다. 주님께 진정한 의미로 다가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던 것입니다.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주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살기 위해 먹어라. 먹기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 소크라테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봉헌이 어떻게 이웃사랑을 완성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어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랑이 이뤄지려면 율법만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율법 학자들이 율법은 알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함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비 전체를 봉헌한 과부가 율법 학자들보다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실천에 봉헌과 무슨 상관인지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봉헌과 사랑 실천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선 사랑은 나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만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싸움을 벌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혈육인 형은 동생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형은 목숨을 걸고 그 나라를 괴롭히는 괴물을 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쪽 팔까지 잃었지만, 결국 형은 괴물을 쳐부수고 임금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동생의 사면권을 요청하였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들고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동생은 풀려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관과 자신을 신고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네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면권을 너에게 줄 수 없단다.”

동생은 갈등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동생은 형에게 그들을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형은 동생에게 사면권을 주고 동생은 그것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형과 사면권과 동생, 삼위일체입니다. 무엇 하나도 없으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닌 사랑은 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일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남편과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랑은 항상 한계를 지니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도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에 찾아갔습니다. 이것도 삼위일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용서하겠다고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평안한 모습의 그를 보고는 울화가 치밉니다. 그녀는 교회에 돌을 던집니다. 왜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왜 사랑이 지속되지 않을까요?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무엇에 죽어야 할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 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밀양에서 주인공은 하느님께서 용서하라는 명령만이 아닌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게 되는 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분께 나의 탐욕의 대상을 봉헌하는 일이 지속되지 않으면 결국엔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될 수 없어집니다. 

만약 빌 클린턴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도 자기희생을 한 힐러리 클린턴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묵상했다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 불륜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묵상함은 봉헌으로 이어지고 그 봉헌이 나의 욕망을 죽여 상대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하느님 희생이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봉헌은 하느님 뜻을 위한 자기 죽음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저명한 작가 C.S. 루이스와 미국 작가 조이 데이빗먼의 사랑은 유명합니다. 독신이었던 루이스에게 조이가 다가옵니다. 조이는 결혼의 실패로 두 아들과 함께 영국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장결혼이 필요합니다. 

루이스는 그녀와 위장결혼을 해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위장결혼 직후 조이가 골수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위장결혼만으로도 조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예상과 달리 조이는 결혼식 후 잠시 차도를 경험하며 함께 몇 년을 더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루이스의 글쓰기에 조이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도왔고 일부는 조이가 나니아 시리즈를 만드는 데 손을 댔다고도 믿습니다. 또 일부는 루시 여왕의 캐릭터가 그녀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루이스는 조이를 끝까지 챙겼고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아들도 끝까지 챙기고 위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루이스는 조이의 아들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이를 챙기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조이를 향한 자기 봉헌이 조이의 아들들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혼을 하고 아이들에게 소홀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아내를 위해 봉헌했기에 아내의 아들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죽지 않으면 삼위일체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피로 죽여야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나의 죽음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나를 죽여 봉헌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분을 위해 내가 봉헌될 때야만 삼위일체 사랑이 지속됩니다. 이 때문에 감사의 마음도 없이 일부를 봉헌하는 율법학자들이 아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한 과부가 더 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랑에 봉헌이 꼭 필요한 이유는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려면 나를 사랑해주신 분께 대한 감사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남겨두지 않고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 

내가 바치는 모든 것, 
그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드리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그걸 자기의 것으로 꿍쳐 놓지 않고 모두 다 바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저께 복음인 12장 28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12장 38-44절의 얘기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비교하며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과부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께서 주셔서,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자기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다 바친 사람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바로 과부와 같은 삶을 산 분입니다. 그의 가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돌려드리고 자기의 것으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자의 가난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히느님까지 잊고사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가난이 있기에 은총도 있습니다. 은총의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끊임없이 나누시는 주님께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고마운 마음 없는 신앙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고마움의 밑바침이 바로 생활의 밑바침이 되어야합니다. 가난은 가난끼리 서로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부여잡고 있는 그것마저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하느님께 내어드리니 갇혀 있던 마음이 풀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안전하고 편안한 것들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일까지 하느님과 나누는 것입니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나눔의 때이며 가장 좋은 기도의 봉헌의 때입니다. 

생활은 나눔이고 나눔은 생활을 권유합니다. 그 어떤 우리의 생활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생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생활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임을 믿습니다. 생활과 신앙은 이렇듯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마음입니다. 하나의 마음을 한 분이신 하느님께 아낌없이 봉헌합니다. 봉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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