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를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로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도움으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2023년 6월 13일 (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6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코린토2서 1,18-22)
예수님께서는“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오 복음
5장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6월 13일 (화)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소개 00:05
📌 미사시작 01:25
📌 강론시작 07:4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6월 13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35
📌 강론시작 17:5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3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59
📌 강론시작 19:1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6월 13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4:36
📌 미사시작 1:04:49
📌 강론시작 1:11:1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세상의 소금과 빛.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소금과 빛에 비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음식 맛을 내는 데 소금이 꼭 필요하듯이, 제자들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짜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하얀 가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여기서 ‘제맛을 잃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모라이노’의 본뜻은 ‘어리석게 되다’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어리석은 길로 향하는 모습을 제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두 번째 은유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참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요한 1,9; 8,12 참조) 그분의 제자들도 세상의 빛으로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소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그리고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서 늘 진리의 빛을 밝히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빛을 바라본 사람들, 곧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본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고, 그들도 또 다른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의 구실을 하여야만 비로소 소금이고, 빛의 구실을 하여야만 비로소 빛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녹여 싱거운 세상에 짠맛으로 간을 맞추는 참된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히는 참빛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일꾼이라면, 그 구실에 알맞은 역량을 기르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해.
샤워하는데 갑자기 눈이 아픕니다. 눈썹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손으로 비벼서 눈썹을 빼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실의 거울에 눈을 비추면서 눈썹 하나를 조심스럽게 뺄 수 있었습니다. 이 거울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제 얼굴이 보입니다. 이제 거울 앞으로 더 다가가서 거울에 얼굴을 딱 붙여보십시오. 더 가까이에 아니 완전히 붙어있는데도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즉,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딱 붙어 바라보면 절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 역시 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말을 잘하지 못했기에 남들 앞에서 말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학창 시절에 과제로 글짓기를 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칭찬받은 적도 그리고 상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역시 저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래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 글쓰기입니다.
자기에 관한 판단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남 보듯이 나를 바라봐야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으며,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그 안에서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아니라, 썩는 것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이기에 고대와 중세에는 화폐나 임금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빛도 아주 중요하지요. 어둠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귀한 우리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힘과 재주가 없다면서 늘 뒤로만 물러서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주님이었습니다. 빵의 기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고 힘없는 우리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가 귀하다고 선언하셨기에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설마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현명한 사람이란 정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금이 제맛을 잃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빛과 소금은 나의 빛과 짠맛으로 무언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향을 주는 일이 ‘착한 행실’,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까요? 짜지 않은 소금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이 어제의 ‘행복 선언’에 이어진다는 것에 착안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란 행복을 잃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얻는 자존감의 상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부터 이미 빛과 소금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으로 생기고 자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곧 행복입니다. 행복을 잃은 사람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보여주려 해도 주님을 찬미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뤽 벡송이 감독한 ‘레옹’(1994)은 매우 다른 두 캐릭터, 즉 고독하고 감정이 없는 암살자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사이의 깊고 특이한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매우 상징적인 소재가 등장하는데, 레옹이 즐겨 마시는 우유와 화분입니다. 우유는 아직 레옹이 정신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화분은 그 이유가 땅에 뿌리박지 못한 식물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레옹은 어렸을 때 살인을 저지르고 더는 성장하지 못한 화분에 심어진 아이와 같은 킬러입니다.
아이와 같은 레옹에게 가족을 잃은 마틸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틸다는 어린애입니다. 처음에 레옹은 마틸다를 꺼렸지만, 그녀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원하는 그녀에게 살인 방법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살인하면 더는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레옹의 말을 듣지 않고 원수를 죽이러 가고 그 과정에서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레옹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에게 오히려 식물은 화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박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마틸다가 레옹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레옹은 글도 읽을 줄 모르지만, 마틸다는 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더 큰 사람에게서 성장한다는 것을 압니다. 레옹은 오히려 마틸다에게 사랑을 배우고 희생을 배웠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으로 상징되는 화분을 땅에 심습니다.
마틸다는 자신이 땅에 심어져야 거기에서 영양분을 얻고 자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레옹은 아닙니다.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화분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에 심어진 식물은 저절로 자랍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도움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땅에 심어진 식물은 크게 자라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사람이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누구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원숭이들에게 길러졌습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만큼 마리나를 키웠습니다. 그가 사냥꾼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사창가의 몸 파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수준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사랑 가득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내가 어느 땅에 심어지느냐에 따라 제맛을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정해집니다.
내가 뿌리박고 있는 땅이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는 성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만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심어진 소금은 제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 맛이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리서는 말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내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먼저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에 행복할 것입니다. 이 맛을 잃으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입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읍시다. 식물은 땅과 하나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가 소금이되 짠맛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착한 행실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착한 행실이란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람들이 찬양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사람들 앞을 비추지 못한다면 착한 행실이 아니고, 그 행실로 인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찬양받기 위한 것이라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착한 행실이 착한 행실임에도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하고, 이웃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사람들은 즉시 그것이 자기 과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케 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할 때 그것이 착한 행실이고 그것이 이웃에게 빛이 되고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주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의 모범입니다.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의 입에는 늘 ‘예’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또 아무 말에나 ‘예’하는 ‘Yes Man’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예’하고 하느님 말씀에만 ‘예’하는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는 ‘아니요’해야 할 때는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예’해야 할 때는 ‘예’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빛이 되고, 하느님께는 찬양이 되는 그런 ‘Yes Man’과 그런 착한 행실의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에게는 소금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소금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사링입니다. 소금과 설탕은 분명히 다릅니다. 소금이 소금을 구원합니다. 절절한 소금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만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소금이 되는 길을 배우는 것입니다.
소금의 목적지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소금같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더 내려가고 더 자주 하느님 안에서 녹는 소금의 생활이 신앙인의 참된 생활입니다.
가슴으로 사는 삶이 소금의 삶입니다. 녹는 것이 합쳐지는 삶입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 소금이 되는 소금의 고백입니다.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녹는 사랑도 있습니다. 녹아야 서로에게 들어갈 수 있는 참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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