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이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네.
하느님, 하느님께 충실한 종들을 성덕의 영광으로 끊임없이 들어 높이시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복된 필립보의 마음을 신비롭게 채우신 그 성령의 불꽃으로 저희 마음도 불타오르게 하소서.
2023년 5월 26일 (금)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5,13ㄴ-21)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1,15-19)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요한복음
21장 15-19절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26일 (금)
장용석 요셉 신부 집전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소개 00:05
📌 미사시작 01:07
📌 강론시작 08:3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26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36
📌 강론시작 16:3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6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16
📌 강론시작 13:3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6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34
📌 미사시작 1:01:54
📌 강론시작 1:10:20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은 부르심 때와 이번뿐입니다(1,42; 21,15-17 참조). 베드로가 당신을 뜨거운 마음으로 따라나서던 그 첫 순간을 기억하기 바라셨나 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며 믿음을 과시하던 일이 떠올라서였을까요? 담담한 그의 대답은 지난날의 교만에 대한 후회가 엿보입니다.
세 번째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세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깊은 원망과 슬픔을 느꼈을 테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세 번이나 사랑을 서약하고 새롭게 태어나 이제 제힘만으로 당신을 따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목자의 사명을 맡기시고 당신 뒤를 따르는 ‘수난과 영광의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살해 위협과(사도 25,3 참조) 모함 속에도 마지막 증언과 순교를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오로의 모습은(제1독서 참조),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불편한 일상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베드로처럼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아룁시다. 마음의 상처와 불편함을 딛고 증언과 순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고인이 계속 생각나면서 지금 함께하지 못함이 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에 생활 자체가 점점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편안한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받았을까요? 대부분 남을 통해 받습니다. 그래서 생(生)의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오직 자기 자신과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다르다는 사소한 차이 때문에 언제나 불협화음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진정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이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다.”
함께하지 못함 자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함께해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혼자라는 상태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처지가 갑자기 180도 바뀔 수 있을까요? 그렇게 바뀌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한 망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자 있는 고독이 두렵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금을 행복의 길로 연결해주는 순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벌벌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리고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이지만, 직접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을 받아들이면서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행복을 만듭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내 모습을 어린양을 돌보는 사랑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결국 남는 건 사랑이야. 다른 이야기들은 희미해지고 흩어지더라.
- 정세랑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반려동물 사랑의 위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고 하십니다. 양은 인간보다 낮은 수준의 동물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양은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양들을 아무렇게나 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중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먼저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려는 것이 옳을까요?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순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라고 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1요한 4,21)라고도 합니다.
곧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지름길이라기보다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나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사랑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이웃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리오나 헬름슬리(Leona Helmsley)는 압제적인 보스로서 악명 높은 미국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연방 소득세 탈세 및 기타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비열한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자기 손자 둘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주지 않았음에도 자기 반려견 트러블에게는 140억 원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녀가 말년에 외로울 때 자신을 위로해 고마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요즘 반려견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호텔도 반려견을 데리고 있을 수 있는 방을 따로 만들어야 장사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해 소비하는 돈의 액수도 엄청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자녀에게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고 또 여러 이유로 이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지 않으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반려동물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세금을 내지 않아서 감옥을 들락거려야 했고 자기 사람들에게는 매우 가혹하게 행동했습니다. 조금의 실수를 하더라도 바로 직원을 해고하였고 직장을 잃고 싶지 않다면 엎드려서 구걸하라고 시켰습니다. 작업을 끝낸 인부들에게 일을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대금을 내지 않았고, 이 외에도 가족에게도 가혹했다고 합니다.
반려견에게는 그렇게 잘하면서 가족이나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매몰찰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해야 형제들이 반려동물보다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들의 가치가 반려동물보다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리오나 헬름슬리는 16세에 학교를 가만두고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습니다. 부모에 대해 알려진 바는 얼마 없지만 부모가 준 이름을 바꾸려 한 것은 부모와 인연을 끊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형제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더 심해져서 손주들보다 개가 더 사랑스럽게 된 것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로,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에게는 한 달에도 100만 원 이상을 쓰면서 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한 푼도 보태주지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개가 더 소중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낳기보다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사랑하는 이들로서는 화가 날 말 같지만, 자칫 우리가 사람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동물에게 더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인간들입니다.
단돈 몇 푼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인간을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또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쩌면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 양 떼를 잘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상관없이 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다지기
오늘 주님의 질문 곧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은 질문을 자아냅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렇게 질문하셨을까? 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질문하셨을까?
세 번 질문하신 것은 세 번 배반한 것에 대한 사랑 확인 차원이라고 쳐도, 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냐고 물으셨을까? 정말 주님의 질문일까? 주님의 질문이라면 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
주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말대로 베드로가 사랑하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다지기이고, 당신 양들을 맡기기 위한 사랑 다지기입니다.
당신의 질문에 베드로가 답할 때마다 내 양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시려는 계획인데 그것도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려는 것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상처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던 내가 불치병으로 아이를 두고 죽게 되었습니다.
맡아줄 사람이 없으면 보육원으로 보내야 하기에 친지나 지인 가운데서 누구한테 맡기는 것이 좋을지, 그리고 누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할 것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아이를 가장 잘 돌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짓궂으시기에 질문하신 것도 아니며 베드로의 입으로 거듭 대답하게 하심으로써 사랑 다지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목자요 스승이신 주님 대신 주님의 모든 양을 잘 보살필 최고 목자가 되려면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게 사랑하는지, 아니 사랑하겠는지 사랑의 의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교황에게도 똑같은 물으실 터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당신을 지금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할 의지가 있는지 다지기 차원에서 물으시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나한테는 묻지 않으실까요?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한없이 사랑하시는 사랑이 예수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랑이어서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부활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사랑 또한 얼마나 깨지기 쉬운 사랑인지를 성 베드로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가장 연약한 것에서 다시 시작되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부족한 사랑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기다려주셨던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려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다시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을 먹이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는 주님 사랑을 기억합니다. 사랑은 우리와 예수님의 공통된 이름입니다.
사랑을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알게되는 사랑의 기쁨입니다. 사랑의 상처에서 사랑의 흉터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사랑하기에 양들이 소중하고 사랑하기에 특별한 우리의 관계는 사랑입니다. 한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의 길을 걸어갑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돌보는 새날 새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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