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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27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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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네.

전능하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마치는 저희에게 너그러이 은혜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 신비를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2023년 5월 27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요한 16,13)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요한 16,13)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8,16-20.30-31)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21,20-25)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27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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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요한복음
21장 20-25절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27일 (토)
최진호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4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27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28

📌 강론시작 12:0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7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7일 (토)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수난과 영광의 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은 부르심 때와 이번뿐입니다(1,42; 21,15-17 참조). 베드로가 당신을 뜨거운 마음으로 따라나서던 그 첫 순간을 기억하기 바라셨나 봅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 하며 믿음을 과시하던 일이 떠올라서였을까요? 담담한 그의 대답은 지난날의 교만에 대한 후회가 엿보입니다.

세 번째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세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깊은 원망과 슬픔을 느꼈을 테지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 세 번이나 사랑을 서약하고 새롭게 태어나 이제 제힘만으로 당신을 따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목자의 사명을 맡기시고 당신 뒤를 따르는 ‘수난과 영광의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살해 위협과(사도 25,3 참조) 모함 속에도 마지막 증언과 순교를 위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오로의 모습은(제1독서 참조), 베드로에게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불편한 일상에 끌려다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베드로처럼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아룁시다. 마음의 상처와 불편함을 딛고 증언과 순교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은 무엇인가 열정적으로 해야 할 때

 

예전에 아버지께서 응급실에 실려 가셨을 때, 처음으로 응급실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주말이었기에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급하게 심폐소생술을 받는 사람,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오열하는 가족들, 사고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계속해서 응급 환자들이 들어왔고, 응급실은 너무 시끄러웠고 또 복잡했습니다. 완전히 전쟁터 같았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또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이 응급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무기력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종종 삶 안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응급실 안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열심히, 온 힘을 다해 살지 않았기에 이런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무기력함을 느낄 때, 우리는 지금 처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황보다는 자신의 열정 없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무엇인가 열정적으로 해야 할 때입니다. 신앙생활이든, 세상의 일이든, 운동이든, 그밖에 해야 할 모든 것에 열정을 가져야 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셨습니까? 식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 열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바쁘신데, 우리는 너무 편안한 것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를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요한 21,21)라고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라고 대답하시지요. 사랑하는 제자의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즉 주님을 따르는 것에 열정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열정을 갖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삶과 부활의 증인으로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나만의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닌,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한 삶에 열정을 보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충분히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

- 벤저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 감정을 책임지는 방법

 

사랑은 무엇일까요? 먼저 이웃의 감정을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기는 자신이 피를 빨아먹는 대상의 감정을 공유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웃의 감정을 공감합니다. 상대의 감정을 읽는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사랑이 줄어 모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웃이 죽고 싶다고 해서 자신도 죽고 싶어지면 될까요? 이것이 공감이고 사랑일까요? 이것은 상대의 감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상대를 잃은 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가 사망하자 같이 따라 죽었습니다. 혼자는 살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일까요? 아마 배우자는 자녀를 두고 자신을 따라오는 남편에 대해 화가 날 것입니다. 

상대의 감정을 공감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상대의 감정을 읽느라 내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묻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내 감정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흔들리는 이유는 나의 행복을 세상 것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니 세상 것과 함께 흔들리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의 배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기감정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 신경을 다른 것에 돌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내가 지금 해야 할 소명에 집중하면 감정을 책임질 수 있게 됩니다. 

얼마 전 레알 마드리드의 유명 축구선수 비니시우스가 또 심한 인종차별을 당했습니다. 경기 도중 화가 나서 관중과 삿대질하였고 결국 퇴장을 당해 경기에 지장을 주었습니다. 만약 그가 경기에 조금 더 높은 비중을 두었다면 감정이 그렇게 자신을 잡아먹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기를 열심히 뛰었을 때 자신에게 오는 영광이 상대편 팬들의 삿대질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위로입니다.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G. Spafford)는 시카고의 탁월한 변호사였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에 스패포드의 삶은 비극적인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그는 선홍열로 네 살 된 아들을 잃었고 시카고 대화재로 대부분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보다 더 불우한 상황에 놓인 노숙자, 빈곤층, 슬픔에 잠긴 화재 희생자를 돕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바쳤습니다.

2년 후인 1873년에 패포드는 휴가를 가족과 함께 영국에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전도 여행을 하고 있던 그의 친구 무디를 만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막바지 사업 개발로 인해 스패포드는 시카고에 머물러야 했고 아내와 네 딸을 먼저 보내고 며칠 후에 따라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비극적으로 그의 가족이 타고 가던 배는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했습니다. 아내 안나는 잔해 조각에 떠 있는 채로 발견되었으며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들의 네 딸 애니, 매기, 베시, 타네타는 모두 사망했습니다. 안나는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남편에게 가슴 아픈 전보를 보냈습니다. 

“혼자 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식을 접한 스패포드는 즉시 시카고를 떠나 슬픔에 잠긴 아내와 합류했습니다. 그의 배가 그의 딸들이 익사한 지점 근처를 지나갈 때 그는 하느님께 절규했습니다. 그때 이상한 마음의 평안함을 느꼈고 즉시 느끼는 대로 시를 썼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찬송가 “It Is Well with My Soul”(내 영혼 평안해)입니다. 

평화 같은 강이, 
내 길을 따라 흐르고,
슬픔 같은 파도가, 
내게 밀려올 때;
어떤 상황이든, 
주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말하리라,
내 영혼이 안녕하다, 
내 영혼이 안녕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안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하느님은 그에게 칭찬과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를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감정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성령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어떤 일도 그 감정을 누를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성령은 당신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만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는 암에 걸렸을 때도 톤즈에서 우물을 파다 온 생각밖에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 우물을 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소명 의식이 감정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주님 소명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 감정을 책임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내가 따라주는 분이 내리시는 보상에 의해서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에서 전쟁 영웅들은 하나하나 죽어갑니다. 그러나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조국을 위해 소명을 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일 줄 알면 그만입니다. 타인 감정에 진심으로 민감한 사람은 자기감정에 무딥니다. 아니 평안함을 누립니다. 내가 타인의 감정에 충실하게 한 그에게서 오는 영광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에 집중하면 감정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방해받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오늘로 부활 시기가 끝납니다. 그래서 독서와 복음도 끝부분인데 그 마지막 말들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둘을 연결하면 주님의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는 방해받지 말고, 주님을 따르는 데는 아무 상관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방해받지 말고 상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것은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도 방해받지 않는 것입니다. 방해해도 그것 때문에 복음 선포를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해하면 방해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방해받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방해해도 방해받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복음이 인간에 의해 그 선포가 좌절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인간 때문에 하느님 복음이 좌절될 수는 없고, 나라는 인간 때문에 좌절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방해에도 나는 자유로워야 하고 하느님의 복음은 더 자유로워야 합니다. 

다음은 주님을 따르면서 쓸데없이 상관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상관은 무엇이고 쓸 데 있는 상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있어서 쓸데없느냐 또는 쓸 데 있느냐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산을 가는데 그 길을 알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 가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부산이 아니라 광주 간다는 하는 사람에게 광주에 왜 가냐고 묻는 것은 부산 가는 내게는 아무 쓸데가 없는 질문이고, 그가 광주 가는 것은 부산 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며, 따르다 보면 원하지 않는 어려움도 겪게 되고 죽게도 될 것이라고 하시자 오늘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선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면에서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같지만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고 요한은 요한의 길이 있어 상관할 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는 내게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이나 호기심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아무 쓸데가 없고, 다른 이와의 비교는 더더욱 아무 쓸데가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이라면 관심이 쓸데없지 않고, 나와 함께 그도 같이 주님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라면 관심을 가져야겠지요. 

아무튼, 당신을 따르며 관심의 허비를 하지 말고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주님 따르기에 우리 모두 전심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과 함께 오늘을 나누는 우리의 사랑이 중요할 뿐입니다. 뜨겁게 이 순간을 사랑하지 못 했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깊어지는 사랑이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하나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멎으면 빠져나갈 구실과 변명만을 찾게 됩니다. 신앙은 결코 변명이 아닙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나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오롯한 마음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돌보는 기쁨입니다. 변명을 버리고 핑계를 버리고 빠져나갈 구실을 버리고 사랑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지금 이 순간이며 오늘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의 관계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아간다는 것은 변명을 멈추고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숨결이 사랑의 숨결이며 뻗어나가는 생명의 기쁨이 됩니다. 상대의 일에 많은 말들이나 간섭이 아닌 배려와 존중이 주님의 이끄심을 믿는 우리들의 건강한 자세입니다. 늘 우리 삶의 방식과 반대편에 계시는 주님께서는 오늘의 소중한 우리의 관계에 충실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나의 길을 우리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이며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가장 좋은 맡겨드림의 날 되시길 기쁘게 기도드립니다.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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