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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22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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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주님, 성령의 힘을 저희에게 주시어 주님의 뜻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거룩한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5월 22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시편 68,7)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시편 68,7)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디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9,1-8)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 오늘 복음
    (요한 16,29-33)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22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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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요한복음
16장 29-33절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29
말하였다. “이제는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시고 비유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30 
저희는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로써 저희는 스승님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33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22일 (월)
유명일 사무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0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22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3

📌 강론시작 15:46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2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02

📌 강론시작 14:4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22일 (월)
팔로티회 분당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0

📌 강론시작 05:0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요한 13―16장 참조) 뒤에 그분께서 ‘하느님에게서 나오신 분’이심을 이제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여서가 아닙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을 예고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머리로 아는 지식이나 믿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제1독서는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페소 신자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의 부르짖음(“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과 서로 어긋나 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나오신’ 예수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아버지와 떨어져 계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외침은 시편 22(21)편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죄 없는 의인이 자신의 수난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받고, 앞으로 온 세상과 미래의 모든 세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기쁨 속에 찬미를 드리는 이 시편 기도는,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외치셨을 예수님의 확신에 찬 고백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얼굴에서 지독한 고독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모든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기쁨을 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도 주님처럼 고난을 겪을 때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말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너머 빛나는 희망과 구원을 바라보며, 주님 뒤를 따라 힘차게 걸어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바라보면, ‘남’도 귀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종종 유명 연예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습니다. 너무나 멋진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이 세상 삶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안고 있는 사람인데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마음속에서 바라보는 자기 모습의 간격이 너무 크다고 하지요. 그래서 우리 머리 위에 자기 몸 상태가 뜨면 참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예를 들면 이런 상태 창이 뜨면 어떨까요? 
 
‘외로움, 힘듦, 지쳤음, 보이기 위한 삶이 싫음.’ 
 
이 상태 창을 보고서 사람들은 좀 더 배려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몸 상태가 드러나는 상태 창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즉, 우리 눈에 상대방의 상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마음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는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어떤 분과 나눈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분은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고, 대인관계도 좋아서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분이었습니다. 가족도 매우 화목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큰 고통과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급히 병원에 가 보니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이분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매우 여리고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보살피고 안아주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내가 함부로 해도 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바라보면, ‘남’도 귀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부셔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벗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벗이 되기 위해 오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겪을 수 있지만,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안에서 평화를 갖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신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입니다. 주님을 믿고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으로 나의 이웃과 함께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의 길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 이관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 세상이 악마의 목구멍임을 잊을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싸우신 것입니다.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있다는 말은 하느님께 속해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1922년 6월 10일 미네소타주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난 주디 갈랜드(Judy Garland)는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배우이자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상징적인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도로시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연으로 그녀는 16세의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디를 스타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주디는 세 자매 중 막내였습니다. 어머니 에델은 방송작가로 자식들을 스타로 만들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각종 무대에 세웠는데 막내 주디는 괴상한 어머니로 인해 네 살 때부터 무대에 올라 노래하였습니다. 

세 자매 중 주디가 재능을 보이자 어머니는 각종 오디션을 통해 열세 살의 주디를 MGM 영화사의 전속 배우로 합격시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의 전성기와 불행이 동시에 시작합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각종 파티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감독과 프로듀서들에게 성접대를 강제로 해야 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미성년자였습니다. 

결국 오즈의 마법사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닦여진 출중한 연기력, 탁월한 노래 실력과 무대 감각으로 각종 영화와 쇼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처참한 비극이 있었습니다. 

당시 40~50년대 할리우드는 ‘핀업걸’이라고 하여 섹시한 여배우들이 유행이었는데 151cm라는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인 그녀는 당시 시류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속사 MGM 영화사는 그녀가 날씬할 수 있도록 식단을 수프 한 그릇만 줄 정도로 엄격하게 감시하고 제한했으며 식사 대신 담배와 ‘암페타민’ 같은 마약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이 암페타민 같은 경우 어머니가 열 살 때부터 주었다고 합니다. 일을 할 때는 마약과 담배를 주고 일이 끝날 때는 ‘바르비튜레이트’라는 강력한 수면제를 먹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녀는 평생 약물 중독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약물중독, 성접대, 가혹한 노동으로 그녀는 정신쇠약에 걸려서 여러 번의 자살 시도와 여러 번의 결혼을 반복하였고 각종 소동과 약물 중독으로 1950년,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머니 에델과 결별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 했습니다. 실력이 출중하여 나름 인기를 유지했지만, 약물남용, 알코올중독, 자살소동으로 그녀의 고통이 지속되었고 1969년 6월 22일 47세의 나이로 바르비투르산염 과다복용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많은 연예인이 어렸을 때부터 세상 인기에 중독되어 결국엔 안 좋은 파국을 맞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우울증에 시달리는 스타들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가 되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속여 그 사람의 재능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단물이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였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세상의 힘은 정말 엄청나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음을 믿읍시다. 이구아수 폭포에 악마의 목구멍이라 이름 붙여진 구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근처로 가면 빨려 들어갑니다.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싸워 이기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신”(2코린 4,4)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떠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 방법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세상은 무엇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려 할까요? 바로 ‘외로움’입니다.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혼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엔가는 소속되려 합니다. 이것을 위해 노력하다 결국 세상에 나 혼자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됩니다. 

주디는 어머니와 세상에 속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속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군가의 공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만든 공간을 지배하는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디가 어머니와 머물기 위해 어머니의 법을 따랐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의 법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음을 믿읍시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믿읍시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법은 아버지께 속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물속에서 수영을 즐기다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세상을 이기는 삶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부러우면 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명품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부럽지 않으면 나는 그도 이기고 세상도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와도 내가 싸우지 않으면,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고, 싸울 마음이 도무지 없으면 그것이 더더욱 완벽하게 이긴 것입니다. 

누가 나를 무시하고 심지어 대놓고 모욕을 퍼부어도,그것으로 내가 무시당하지 않고 욕을 먹지 않으며 화가 나지 않고 여전히 평화롭다면 그것이 그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말로는 믿는다고 하고선 배신하고 떠날지라도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지 않고 여전히 믿어주고 오히려 용서한다면 그것이 그를 이긴 것이고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미움엔 사랑이 승리고,
배신엔 믿음이 승리고,
상처엔 용서가 승리고,
모욕엔 평상심이 승리고,
세상에 대해서는 승천이 승리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삶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고,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임을 알지만 관건은 어떻게 이 승리의 삶을 살아낼 것인가, 그것이겠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신다고 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 때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내렸던 성령이 우리게도 임하기를 우리도 빌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용기는 실행입니다. 실행하시는 새로운 용기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용기를 낼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고난도 은총이 됩니다. 평화를 사랑할 용기를 배우고 두려움과 싸울 용기를 냅니다. 용기를 내면서 용기는 다름아닌 주님을 향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니다. 공동체의 삶에서도 용기가 필요한 용기의 여정입니다. 피하지 않는 용기 시간을 견디어 내는 용기가 필요한 공동체의 삶입니다. 용기의 근간과 중심에는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치열한 사랑 치열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용기는 용기를 낳고 비겁은 비겁을 낳습니다. 

용기는 가장 뜨거운 삶의 변화입니다. 용기는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용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믿는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씩 이루어 나갑니다. 패배와 실패에서도 다시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복음이라 부릅니다. 용기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주님을 닮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며 용기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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