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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18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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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 백성에 앞장서 나아가실 제, 그들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 주실 제,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이 되어 쏟아졌나이다. 

하느님, 저희를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시니 저희가 주님의 부활을 전하며 영원히 기뻐하게 하소서.

 

2023년 5월 18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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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1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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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요한 복음
16장 16-20절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18일 (목)
김영주 니코메디아의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18일 (목)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19

📌 강론시작 14:5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https://www.youtube.com/live/YS4nHk8Hgdo?feature=share&t=105

 

2023년 5월 18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45

📌 강론시작 09:4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8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19

📌 미사시작 1:02:02

📌 강론시작 1:09:4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조금 있으면, 그 “조금”의 시간 동안

 

오늘 복음에는 “조금 있으면”(그리스 말 ‘미크론’)이라는 낱말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호세 1,4; 이사 10,25; 예레 51,33 참조)이나 구원(이사 29,17 참조)의 때가 가까웠음을 예고할 때 쓰던 고유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때가 가까웠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두 번의 “조금”의 시간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하루 남짓한 시간과, 죽음부터 부활까지 그분을 볼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조금”의 시간에 제자들은 엄청난 일을 겪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이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붙잡히신 주님을 배신하고 외면한 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 슬픔과 후회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조금”의 시간 동안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마주할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아셨기에, 앞으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게 될 큰 기쁨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은 그날의 제자들이 살았던 그 “조금”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슬픔과 기쁨, 불확신과 굳은 믿음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여정이 말하여 주듯, 실패한 듯 보이는 일에서도 승리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제1독서 참조) 희망 속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책상 위에는 얇은 나무 막대기가 많습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50개 이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회초리? 저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젓가락? 이 역시 아닙니다.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나무젓가락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지요. 정답은 연필입니다. 
 
한때 연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모든 글을 연필로 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번거로웠습니다. 흑연이 번져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때도 있었고, 특히 연필 깎는 수고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필기감도 좋고 글씨도 잘 번지지 않는(물론 물이 묻으면 심하게 번지는 단점이 있지만) 만년필을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연필이 제 역할을 못 합니다. 그래서 현재 연필은 필기도구라기보다 그냥 얇은 나무 막대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연필의 의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의미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관심을 두고 사용해야 합니다. 책을 사서 책장에만 꽂혀있다면 어떨까요? 그냥 종이 뭉치일 뿐입니다. 목걸이, 귀걸이가 서랍 깊숙이만 있다면 그냥 쇠조각일 따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의미’ 없는 만남일 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시간 낭비야.’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듭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떤가요? 큰 의미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분이십니까? 혹시 관심이 없어서 주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이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조금 더 알려고 하고, 조금 더 기도하면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나 귀한 분으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직 겪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만큼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에 울며 애통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통해 이루어질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관심이 의미를 만드는 것처럼, 주님께 대한 관심으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했던 사도를 우리는 독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삶의 유일한 의미로 복음을 받아들인 뒤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한 생활은 마음의 평화에서 이루어진다.

- 키케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시지 않는다고 하시며 떠나는 것은 잠시지만 그 근심은 “조금 있으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하십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이 근심할 때는 세상이 기뻐할 때이고 세상이 근심으로 바뀔 때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려는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했을 때 주시려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살려고 결심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주님은 성령의 도우심을 주십니다. 우리 힘으로는 용서도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가 유영철을 용서할 마음이 생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그 마음을 채워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물론 고정원 씨는 성령을 받는 시간인 기도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고정원 씨가 고통을 받을 때는 세상은 ‘그것 봐, 용서가 안 되지?’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세상은 고통 속에 잠겼습니다. 유영철을 양자로 삼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정원 씨는 용서가 되는 신기함에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과 사랑이 희망 속에서 성장합니다. 

윌마 루돌프는 1940년 6월 23일 테네시 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정에서 22명의 자녀를 둔 가정에서 갓 1kg이 넘는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루돌프는 네 살 때 왼쪽 다리와 발이 마비된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그녀의 가족에게 그녀가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가족은 매우 종교적이었고 그들의 신앙은 이 어려운 시기에 힘과 희망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기적과 기도의 힘을 믿었고 자신이 직접 집에서 정기적인 물리 치료를 하였습니다. 딸의 삶을 장애로 정의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그녀의 믿음에 대한 증거였으며, 그녀는 이러한 믿음을 윌마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의 믿음을 비웃던 의사들은 아홉 살 때 루돌프가 다리 보조기 없이 걷는 법을 배운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농구와 육상 경기에 대한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녀는 걸을 수도 없었지만,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루돌프는 엄청난 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루돌프가 16세의 나이에 1956년 멜버른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 출전하여 4x1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4년 후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그녀는 100m, 200m, 4x100m 계주에서 단일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트랙에서 은퇴한 후 루돌프는 교사와 코치가 되었고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아프리카 여성들의 인권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젊은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믿음을 공유하고 그들도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무언가 하려면 비웃습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참아내게 합니다. 사랑은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은 인내를 낳습니다. 그 인내 뒤에 반드시 기쁨이 온다는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도 믿음으로 세상의 비웃음과 맞서 결국 기쁨을 쟁취한 인물입니다. 

1940년 6월 28일 방글라데시 치타공 항구 도시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회적 기업가, 경제학자, 시민사회 지도자로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고 소액 신용대출 개념을 개척한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유누스는 가족 중 아홉 자녀 중 세 번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금세공인으로 항상 아들들에게 고등 교육을 받도록 격려했습니다.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다카 대학교에 다녔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 해방전쟁이 끝난 1972년 유누스는 치타공대학교 경제학과장이 됐다. 1974년 방글라데시의 기근은 유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유누스는 경제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고 경제 이론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방법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유누스는 학교를 나와 가난한 사람들과 머무는 실험을 계속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인력거를 17,000원에 비싼 이자로 빌려 허덕이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실험을 합니다. 

그의 첫 번째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요브라 마을에서 대나무 가구 만드는 42명의 여성에게 주머니에서 총 27달러를 빌려준 것입니다. 이 소액 대출을 통해 원자재를 구입하고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아무도 안 갚을 것이라고. 그러나 돈의 회수율은 98%였습니다. 세상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에 힘입어 유누스는 1983년에 Grameen Bank(Village Bank)를 설립했습니다. 이 은행은 상호 신뢰, 책임, 참여 및 창의성에 기반을 둔 은행 시스템인 신뢰와 연대의 원칙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거나 소규모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로 알려진 소액 대출을 제공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라민 은행은 크게 성장했으며 전 세계의 다른 소액 대출 기관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2021년 9월을 기준으로 그라민 은행은 2,600개 이상의 지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방글라데시의 81,000개 이상의 마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금은 수조 원대로 늘었고 상환율은 90% 이상입니다. 

소액 금융 분야에서 유누스의 업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2006년에 그와 그라민 은행은 “아래로부터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세상의 비웃음을 오히려 비웃으며 꿈을 이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비웃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고 세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은 우리 기쁨의 바위.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제 조금 있으면 제자들이 당신을 볼 수 없게 돼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돼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에 관해 성찰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모든 근심이 다 기쁨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되치기를 잘하여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지만 어떤 사람은 외부 상황에 의해 자기의 근심과 기쁨이 좌우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옹지마의 얘기는 우리 인생을 깊이 생각게 하지요.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오랑캐 땅으로 도망치고 이에 이웃이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소"라며 태연하게 말합니다. 과연 며칠 후, 노인의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하자 노인은 담담하게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알겠소"라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노인의 아들이 오랑캐 땅에서 온 말을 길들이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맙니다. 

이에 이웃들이 노인을 위로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담담하게 "이 일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라고 말하고, 과연 노인의 말대로 몇 년이 지나 전쟁이 났을 때 다른 집 아들들은 전쟁에 나가 다 죽었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친 다리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땅을 치며 애통할 일도 있고 기뻐 춤출 일도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출렁일 수도 있고 이 노인처럼 길흉화복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관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의 근심과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슬퍼할 일도 많고 기뻐할 일도 많지만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고,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도 주님 때문이어야 한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근심과 기쁨이고, 동양의 행불행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행불행입니다. 조금 있으면 주님이 안 계시기에 우리는 근심하고, 조금 더 있어 주님께서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게 되는, 그런 인생이어야 하고,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것들로 인해서는 우리 인생이 출렁거리지도 않고 일희일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근심거리고, 주님이 함께 계시면 온갖 근심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쁨은 온갖 출렁거림을 막아 잔잔해지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묵직한 바위와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희로애락에 까불리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하시는 기쁨의 바위라고 다시금 고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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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참 기쁘고 아름다운 새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맑은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의 근심은 주님의 기쁨으로 허물어집니다. 기쁨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기쁨을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기쁨이 근심을 치유합니다. 서로 나누어야 할 주님의 기쁨입니다. 아무리 더 가지려 해도 더 가질 수 없는 우리의 욕망입니다. 욕망의 포로에서 벗어나는 참된 기쁨입니다.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붙어있는 기쁨입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주님을 향합니다. 주님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빛나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기쁨을 빚어주시는 주님을 통하여 참 사랑을 만납니다. 

늘 우리에게 먼저 오시는 기쁨입니다. 오늘도 영원한 기쁨을 선물 받았습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바치시고 가장 좋은 기쁨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오늘을 삽니다. 

근심은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장 좋고 가장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리는 기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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