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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1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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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주님,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어 저희가 신비로운 이 예식으로 성자의 부활 축제를 지내며 다시 오시는 그분을 모든 성인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2023년 5월 17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사도행전 성경 말씀 카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사도 17,28) 사도행전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7,15.22─18,1)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6,12-15)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1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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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2-15절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17일 (수)
이승화 시몬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17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2:54

📌 강론시작 12:3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7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2

📌 강론시작 11:0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7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09

📌 미사시작 1:00:29

📌 강론시작 1:10:5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바오로 사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대담을 나눕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고대 아테네에서 최고 의회가 열리던 곳)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17,19) 

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교의 철학 사상이 만나고, 바오로의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연설’이 이루어집니다(제1독서 참조). 이 연설은 바오로가 이교인들에게 한 설교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뛰어난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은 뒤에도 영혼이 불멸하다고 여기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이해하지 못하고 바오로의 설교를 비웃거나 외면하였습니다. 결국 바오로는 아테네에서만큼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지 못합니다.

높은 수준의 학식과 문화를 지녔고 새로운 지식에도 열려 있던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선뜻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복음을 믿는 일은 이성과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시면서, 삼위의 완전한 일치 안에 계신 “진리의 영”만이 구원의 진리를 알아듣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를 의심과 불확실성 속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읽기 전 먼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듯이, 모든 일에 앞서 성령께 지혜와 보호를 청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모두 다른 이유.

 

고등학생 때,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바로 홍콩 영화입니다. 코믹 쿵푸 영화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많이 인상 남는 영화는 현대식 무협이라고 할 수 있는 느와르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정을 위해 총격전을 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남기는 말은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영화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도박이었습니다. 도박의 승부를 퉁홰 나쁜 악당을 응징하던 모습은 통쾌함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최고의 패를 가졌다면서 회심의 미소를 띠는 악당,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주인공이 더 높은 패를 꺼내면서 승리합니다. 때로는 악당의 속임수를 더 큰 속임수로 이기기도 합니다. 
 
그때 보았던 영화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패를 펼쳤는데, 상대의 패와 똑같다면 어떻게 될까요? 카드가 잘못되었다며 무효 처리가 될 것입니다. 카드는 모두 달라야 게임이 공평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이유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모두 달라야 우리 각자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과 같은 패를 받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처럼 능력이 있었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돈이 많았으면 싶고, 저 사람처럼 몸이 건강했으면 좋고…. ‘저 사람처럼….’이라는 말로 같은 패를 같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삶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이 다름으로 인해 부러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을 내 삶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면 나만의 삶을 멋지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말 것, 쓸데없는 판단을 하지 말 것, 나를 특히 나의 삶을 사랑할 것. 이런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주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실 것이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만 집중합니다. 성령을 받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변화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 세상을 남처럼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모두 성령의 진정한 역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참 진리의 삶인 주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저 남처럼 풍요하고 화려하게 살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런 마음으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삶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손해 본 일은 모래 위에 새겨 두고, 은혜 입은 일은 대리석 위에 새겨두라.

- 벤저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든 진리 안에 하나의 진리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오늘 주님 말씀을 풀어서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알고 계신 것과 그래서 당신이 알려주고 싶은 것이 참으로 많은데 그것을 지금 알려주어도 그 모든 것을 지금은 감당할 수 없는 우리이기에 지금은 알려줄 수가 없고 나중에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진리의 성령께서 친절하게 알려주실 거라는 말씀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진리는 당신의 때가 아니라 성령의 때에 당신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알려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든 진리는 무엇입니까? 낱낱의 진리의 집합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진리, 저것도 진리인데 그 모든 진리를 모아놓은 진리 말입니다. 

그런 뜻이기도 하지만 모든 진리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모든 진리이시고 하느님 안에 모든 진리가 있다는 얘기이며, 그러니 무릇 모든 진리란 하느님 안에 있어야만 진리라는 얘기입니다. 

실로 많은 진리가 있고, 이것이 진리라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진리도 있고 주장되는 진리도 있기에 어떤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주장되는 진리라는 말이며 어떤 진리가 참 진리라면 하느님 안에 있어야 진리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진리, 무신론적인 진화론이 있습니다. 거기서 얘기하는 것이 진리를 얘기하는 것일 수 있고 실제로 진리를 말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일부 진리를 가지고 모든 진리라고 말하며 더욱이 모든 존재들의 생성과 진화가 하느님 밖에서 이뤄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부 진리를 가지고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꼴이며 그래서 그런 주장은 진실이 아니고 진리와 진실을 부정하는 오류입니다. 

또 불교도 진리를 말하고, 유교도 진리를 말하며, 이슬람도 진리를 말하고, 그리스도교도 진리를 말합니다. 불교와 유교는 하느님을 입에 꺼내지도 않고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불교와 유교는 하느님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말에 진리가 없다고 유신론의 종교들이 얘기하고 하느님을 얘기하지만 이슬람에는 진리가 없다고 그리스도교가 얘기한다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주장하는 진리 하나만 가지고 그 많은 진리와 그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런 그리스도교 주장이 진리가 아니고 오류입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모든 진리를 그것도 다 알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되고, 주장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보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겸손하게 진리를 소유했고 더 보편적인 진리를 소유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만 하느님을 소유했고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신 너머로 모르는 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아테네인들이 오히려 진리에 더 가깝고, 더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평가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이며 모든 진리 안에서 한 진리를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시민이 모르는 그 신 안에서 우리는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고 얘기하고, 주님께서도 진리의 성령이 모든 진리를 알게 해주실 거라고 얘기하지 않고,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이고, 진리의 영이 오셔야 그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겸손한 우리가 오늘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생명과 진리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생명과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 공동체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공동체를 되살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삶의 공동체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람답게 살아가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억압과 파괴가 아닌 성장과 자유를 향합니다. 

자아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서 신앙의 유대와 배려로 새로워지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이렇듯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합니다. 미움과 거짓의 벽이 허물어지는 건강한 공동체로 우리를 이끕니다. 

공동체적 삶의 길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공동체의 실현은 복음의 실현이며 성령의 기쁨입니다. 하루 빨리 아픈 이들은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뻐하는 마음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공동체의 힘입니다. 

성령의 사명은 공동체를 다시 살리는 생명과 진리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공동체의 사랑이며 공동체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공동체를 맡겨드립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계획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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