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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16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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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전능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5월 16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도행전 성경 말씀 카드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사도 16,26)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사도 16,26) 사도행전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6,22-34)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1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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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요한복음
165-11절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16일 (화)
김홍주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16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1

📌 강론시작 15:2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6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02

📌 강론시작 09:5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6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52

📌 미사시작 1:01:11

📌 강론시작 1:08:4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감옥에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

 

예수님의 공생활 때 제자들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분께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마르 8,32; 9,32; 10,32 참조). 예수님과 이별을 앞둔 순간까지도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찬 것은, 그분께서 떠나시는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앞날이 불안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반대와 위협에서 제자들을 지켜 주셨고, 이별의 때가 되자 그들을 보호해 주실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하신 것은 어리석고 나약한 제자들이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받은 뒤에는 진정한 ‘복음의 증거자’로 새롭게 바뀔 것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의 영”(요한 15,26; 16,13)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죄”임을 아는 유다인들에게 다음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분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 그들이 불의한 자로 단죄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어 영광 속에 드높여지시고 “의로움”이 드러났다는 사실, 세상은 자신이 예수님을 ‘심판’하였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악과 어둠이 ‘심판’받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옷 벗김과 매질을 당한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서도 찬미가를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이시며, 복음을 받아들인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신 보호자 성령께서(제1독서 참조) 우리 가정과 이웃에게 찬미와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화가 중 하나로 뽑힙니다. 대상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전통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빛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대상의 색과 형태를 포착하여 그리는 인상주의로 당대 미술계의 새로운 움직임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말년에 화가에게 치명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됩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 악화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요? 만약 포기했다면, 명작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누구나 어떤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가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새로움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에 절망과 포기의 연속이었지만,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이라는 새로움은 그들에게 새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없는 새로움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성령을 통해 또 다른 삶, 새로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고 하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많은 은사와 열매를 받은 제자들은 새롭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 좌절과 절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을 봐야 할 때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실라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 16,31) 
 
바로 믿음만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잘못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잘못이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포도나무 비유에 들어있는 삼위일체 신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데 왜 떠나야할까요? 그것은 사랑이 삼위일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거름을 받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가지에 성령의 수액을 넘겨줄 수 없습니다. 

이별 영화의 대명사인 ‘카사블랑카’(1942)에서 이러한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지배하는 모로코의 도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합니다. 카사블랑카는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통행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릭은 카사블랑카에서 유명한 나이트클럽과 도박장을 소유하고 있는 냉소적인 미국 국외 거주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유럽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때 파리에서 릭의 전 애인 엘사가 남편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들은 릭이 소유한 ‘통행증’을 얻기 위해 카사 블랑카에 있습니다. 이 통행증만 있으면 독일 점령 유럽과 중립 포르투갈을 자유롭게 여행 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미국으로가는 배를 탈 수도 있습니다. 릭은 나치가 파리를 침공했을 때 엘사가 갑자기 그를 파리에 남겨둔 것에 대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사실 엘사는 독일에 대항해 싸우던 남편이 죽었다고 믿어서 릭과 사랑에 빠졌던 것인데 남편 빅터가 살아 돌아와 결국엔 빅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릭과 엘사의 과거 관계를 알고있는 빅터는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잡혀가면서 자기 아내 엘사를 릭에게 부탁합니다. 엘사도 릭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릭은 자신의 친구 고위 경찰에게 자신이 빅터에게 통행증을 전해줄 때 잡으면 더 큰 공을 올리게 될 것이라며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릭이 만든 함정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독일군 서장의 서명이 있어야 하는데 서장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둘을 떠나보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스트라사 소령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막으려합니다. 릭은 그를 총으로 사살합니다. 그리고 릭은 빅터와 엘사가 행복할 수 있게 영원히 떠나보내 보내줍니다. 경찰서장 루이는 릭의 친구였기 때문에 웃으며 릭이 피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둘은 진정한 우정관계를 시작합니다. 

릭이 사랑하는 여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카사블랑카에 범죄자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니까 떠나야 하는 영화의 대명사입니다. 떠나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상징되는 통행증이 엘사와 남편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 머물러야만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엘사의 남편 빅터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에게 죄는 독일에 저항하지 않는 릭입니다. 그는 독일에 저항함으로써 의로워진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독일이라는 악을 심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죄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내주려는 릭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함으로써가 아닌 자신이 릭의 목숨값으로 받은 통행증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또한 릭이 독일군 장교를 처단한 것처럼 악의 심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악에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서 교회에 맡긴 성사라는 통행증을 받고 의로워지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심판을 이긴 것입니다. 

사랑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비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도 잘 떠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릭은 엘사를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빅터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릭의 친구 루이가 아니면 통행증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배우자를 위해, 자녀를 위해, 친구를 위해 주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총을 직접 받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줄 것이 없으면서 붙어만 있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원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서 흘러오는 수액과 같습니다.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흘러들지만, 사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가 계시고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성령의 거름으로 포도나무를 키웁니다. 그래야 가지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우리를 떠난 분을 볼 수 있을까요? 만약 아버지가 매일 집에만 있다면 자녀들은 좋을까요? 불안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밖에 나가야 돈을 벌어오는지 압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버지가 안 보이는 것을 기뻐합니다. 물론 규칙적으로 만나주기는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주 가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며 저를 키우셨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의 일하는 곳까지 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자리는 그분이 일하는 곳에서 그 일에 참여할 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떠나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여 당신이 계신 곳에 오도록.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디로 갈거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오늘 말씀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떠남과 보냄 사이에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보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느님을 보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십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가리키시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방향에는 언제나 성령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 우리를 안내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잘못된 생각에서 우리를 보호하어 주십니다.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다시 잡을 때입니다. 방향 없이 살았던 삶을 반성합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들에게 사랑의 방향을 되찾아 주십니다. 

하느님이 없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떠나야 할 때가 있고 가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우는 신앙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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