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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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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소서. 알렐루야.

주님, 기쁜 마음으로 거행하는 이 파스카 신비를 저희가 날마다 실천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소서.

 

2023년 5월 12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하느님, 하늘 높이 오르소서. (시편 57,12)

 

하느님, 하늘 높이 오르소서. (시편 57,12)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5,22-31)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1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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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복음
요한 15장 12-17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12일 (금)
김보습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5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12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1

📌 강론시작 16:2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2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45

📌 강론시작 14: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사랑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이사 41,8)과 모세(탈출 33,11)는 ‘하느님의 벗’으로 불립니다. 신앙의 정수를 살아간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고(창세 18,17 참조),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하여 사귀셨습니다(탈출 33,11; 신명 34,10 참조). 사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오직 하느님께서 호의로 베푸신 매우 예외적인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당부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종과 달리, 벗의 뜻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동의하여 그를 따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운 순종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할례를 비롯한 지난날의 복잡한 규정들을 이방계 신자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우상 숭배)과 피째 고기를 먹는 일(‘생명[피]은 오직 하느님의 것’)과 불륜을 금하는(가정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계명만을 요구함으로써, 개종한 형제들도 ‘주님의 벗’이 되어 자유롭게 순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내가 어찌 누구를 미워하고 내 벗이 될 자격이 없다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을 닮아 목숨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나를 뽑아 세우신 주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사랑과 구원의 열매를 맺는 그분의 사랑받는 포도나무로 영글어 가는 우리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에서 가장 기부를 잘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낯선 사람 도와주기, 금전적 기부, 자원 봉사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세계기부지수(영국자선단체 자선자원재단과 미국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매년 발표합니다) 순위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나라가 있습니다. 동남아에 있는 미얀마(2022년은 5위입니다)였습니다. 이 나라의 1인당 국민 총생산(GDP)은 우리나라의 1/3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잘 사는 우리나라의 순위는 어떻게 될까요? 조사 대상 119개국 중에서 88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2년 보고서에 나오는 상위 10개국 중 우리보다 못 산다고 평가받는 나라가 너무 많습니다. 1위 인도네시아, 2위 케냐, 6위 시에라리온, 8위 잠비아, 9위 우크라이나. 모두 1인당 GDP가 현저히 우리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기부는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행복한 사람,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남을 위해 기부한 뒤에 심리적 포만감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라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엔도르핀 분비가 정상치의 3배까지 올라가며,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고,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가 증가해서 불면증과 만성 통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나 선한 일을 쳐다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만 봐도 건강해진다는 ‘마더 데레사 효과’). 
 
주님께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받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특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 자체가 결국 나를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라는 분이 먼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성찰의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죄악이어야 한다.

- 토마스 아 켐피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렇게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십니다 .

 

기도를 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1. 부정한 동기
2. 회개 없음
3. 약한 믿음
4. 하느님 계획과 반대되는 기도
5. 끈질기지 못함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자격 없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을 줘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에 계속 은총을 소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 열매를 맺는 가지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영화 ‘몬테 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 2002)은 친구의 여인을 사랑한 페르난도가 친구 에드먼드를 반역죄로 몰아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히게 하여 자신이 친구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에드먼드는 결혼식 당일에 체포되어 샹티요 감옥에 갇히고, 그의 미래와 사랑을 모두 빼앗깁니다. 그는 감옥에서 고독과 절망에 시달리며 13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 감옥에서 아베 신부를 동료 수감자로 만나고 그에게 글도 배우고 검술도 배워 결국 탈출에 성공하여 몬테크리스토섬에 숨겨진 보물도 찾습니다.

에드먼드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파리 사회에 재진입하며, 그의 적들을 하나씩 파멸시킵니다. 그는 페르난도 몬데고를 파산시키고, 그의 이전의 상사인 덩글라르를 범죄자로 만들며, 그의 배신자인 빌포르를 미쳐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에드먼드는 복수의 경로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를 사랑했던 메르세데스가 그들의 아들을 키우기 위해 페르난도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페르난도는 지금까지 키운 아이가 자기 아들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그 아들마저 죽이려 합니다. 이미 복수에 지쳐있었던 에드먼드였지만, 자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페르난도를 죽이고 결국 복수를 완성합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성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성령님을 살리는 길은 열매가 유지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을 죽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가지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수액을 청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성령께 아버지를 향해 칼을 치켜들게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라고 계속 성령님을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아들은 195cm, 그리고 아버지는 134cm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배구선수 한성정 씨와 그의 아버지 한은범 씨입니다. 한은범 씨는 어렸을 때 사고로 뼈가 튀어나오며 자라지 못하는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다행히 몸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키가 커서 배구선수로 뽑혔습니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아버지는 몰래 응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까, 주변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며 경기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다른 부모님은 배구장에 오시는데 아버지는 왜 안 오시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괜히 기죽을까 봐”라고 답했습니다. 한성정은 “오히려 그 말씀이 너무 서운했다”라고 합니다. 아들은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아버지가 오시면 제가 더 힘이 나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아버지 욕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고 그 이후부터는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수백 킬로를 달려서 경기장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할까요? 사랑은 준 것을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한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매만지며, “날 위해 온갖 일을 다하셨다. 내가 어릴 적, 차가운 물 속에서 오랫동안 수도 관련 일하며 동상에 걸리셨다”라며 “요즘에는 손도 잘 구부러지지 않는다. 지문도 거의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선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집도 지어드리고 차도 사 드렸습니다. 남들이 훈련을 땡땡이치고 도망갈 때 한성정 선수는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신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그 은총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아버지께 청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지켜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결정을 할 때.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도 회의의 결과를 안티오키아 교회에 알리면서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다고 하지 않고 성령과 같이 결정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지는 아주 쉽게 답이 나왔습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청소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공부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대화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요리를 해도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특히 요즘 저는 여기 밥상을 하면서 저의 조리가 정성을 넘어 사랑이 되고, 식탁에서의 봉사와 대화가 사랑이 되고 영적 대화가 되게 하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애를 써왔지만, 오늘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부족함, 곧 '성령과 함께'가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뭐든 사랑으로 하기로 잘 결정했다고 안심하였는데 사랑으로 하기로 성령과 결정하지 않고 그래서 사랑도 성령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그리고 제힘으로 하려 하는 잘못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옳고 좋은 것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고 완수하느냐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등급 매기기를 자주 하는데 결정과 관련하여 등급을 매기면 이럴 것입니다. 

결정에 있어서 제일 미성숙한 것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을 남에게 미루는 것일 겁니다. 결정 장애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수준으로 결정 못하는 경우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이든 수도원 입회든 결정을 제때에 못하여 뒤늦게 수도원에 지원하는 비율이 높아지는데 부모의 사랑이 넘쳐서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그런 부모 밑에서 결정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자녀가 순종의 미명하에 결정을 미루다 보니 그리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비해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도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정하면 그만큼 성숙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럴 경우, 자기 결정에 책임지기 위해서 결정한 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성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잘하는 것도 성숙함이지만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이 더 성숙합니다. 같이 결정 내리지 못하고 독불장군식으로 결정한다면 이런 결정을 가지고 성숙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보다 우리 신앙인에게 더 성숙한 것이 바로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성령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원의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성령 송가’를 부르며 회의를 시작하는데 시작은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자기주장들을 내세웁니다. 

이런 경우 이것을 절반만 성공한 것이랄까, 절반만 성숙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지만,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성령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의 결정으로부터 배우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놓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타오르는 사랑이신 예수님을 통해 목숨을 내놓는 진짜 하늘을 봅니다. 하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밥과 목숨 사이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놓아야 얻게되는 사랑의 신비 목숨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최전방에 언제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진정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보여주려는 것에만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목숨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목숨 아래서 서로를 사랑해야 할 오늘입니다. 청하고 보듬고 껴안아야 할 목숨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통해 사랑의 명령이 다름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서로 사랑하듯 서로의 마음을 알아듣는 사랑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병든 사랑이 아닌 건강한 사랑의 방향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사랑다운 사랑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습니다. 목숨다운 목숨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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