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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1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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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어 말씀이신 성자께서 하신 거룩한 약속이 복음 전파로 온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주님의 모든 자녀가 진리를 따라 살게 하소서.

 

2023년 5월 19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8,9-18)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오늘 복음
    (요한 16,20-23ㄱ)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1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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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복음
요한 16장 20-23ㄱ절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1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22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19일 (금)
김홍주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3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19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24

📌 강론시작 17:0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9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19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확고한 믿음과 기쁨.

 

복음 속 주님의 말씀은 온통 ‘근심’과 ‘기쁨’이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제 당신을 잃고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장례 때 곡하는 행위) 그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을 믿고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 과연 그분의 뜻을 알아듣고 깊은 슬픔과 걱정에서 선뜻 돌아설 수 있었을까 생각되지만, 자상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산고를 겪는 여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미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해산하는 여인’을 ‘메시아 시대의 구원’의 상징으로 자주 썼습니다(이사 26,16-19; 66,7-14; 묵시 12,2-5 참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같은 주님의 약속은 고된 일상과 눈물 속에서도 영원한 기쁨을 바라는 모든 이를 향합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현존과 보호를 믿는 이가 얼마나 담대한지 전하여 줍니다. 코린토에서 동족들의 모욕과 반대를 받고 시름에 빠진 바오로에게,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니 그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바오로는 계속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모함하던 유다인들은 이내 재판정에서 쫓겨나 큰 수치를 당합니다. 증오심과 폭력성을 드러낸 그들은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매질하지만, 그 또한 굴복하지 않습니다. 바오로와 소스테네스의 근심과 고통은 주님의 현존 안에서 아무도 빼앗지 못할 확고한 믿음과 기쁨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까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앞선다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알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 끝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는데, 우리라고 어찌 그 길을 피하여 갈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루 10분이라는 시간

 

영국의 한 연구팀이 70세 전후의 259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자기반성과 치매의 연관성에 관한 연구였는데, 그 결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확한 인과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반성의 시간을 하루에 10분 이상 갖게 되면 분명히 인지력과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치매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연구 발표에서도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영양제보다도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10분이라는 시간. 아주 긴 시간일까요?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뇌 건강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10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아까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건강이 최고라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이 하는 기도, 묵상은 꼭 필요한 영양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영양제를 먹으면서 건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이고 필요한 시간인데도 항상 뒤로 미뤄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일이 급해서, 피곤해서,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등의 말로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맨 뒤로 미룹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모습입니다. 
 
올해부터 저는 혈압약을 먹습니다. 종합검진을 받은 뒤, 이제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면서 아침 식사 후에 한 알씩 꼭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경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복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들은 혈압 조절이 안 될 수 있어서 규칙적인 복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신경 써서 규칙적인 복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묵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뒤로 미루다가는 나중에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난 전날 겪을 제자들의 슬픔과 고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큰 사건을 기다리는 고통이라고 하시지요. 마치 진통의 고통을 겪은 뒤에 사랑하는 아기를 낳는 것처럼, 그 고통 뒤에 고통을 잊을 만큼의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지금 주님을 만나고 지금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라는 이유를 붙여서 후회의 시간을 만들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의 시간을 위해 지금 당장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랜디 포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의 사람이 누구에게도 기쁨을 빼앗길 수 없는 이유.

 

코리 텐 붐은 1892년 4월 15일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의 네 자녀 중 막내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캐스퍼 텐 붐은 존경받는 시계공이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텐 붐 가족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종교가 깊고 이웃 사랑의 원칙을 믿는 텐 붐 부부는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집에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코리의 침실에 숨겨진 방을 지었고, 그곳은 그들이 수년 동안 보호했던 많은 유대인을 위한 은신처 역할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텐 붐 일가는 네덜란드 정보원에게 배신당했습니다. 나치는 그들의 집을 급습하고 온 가족을 체포했습니다. 코리와 그녀의 언니는 결국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가혹했고 언니는 1944년 12월에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은 네덜란드로 돌아와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을 위한 재활 센터를 세웠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자기 경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기 위해 대중 연설자로 전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1947년 코리 텐 붐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했던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코리 텐 붐의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코리야 용서하거라.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이다. 내 명령에 순종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코리 텐 붐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원수와 같았던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힘을 느끼며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간수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러한 용서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가 시계공을 할 때 어떤 부자가 비싼 시계를 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왜 시계를 새로 사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사람은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시계를 보고 자신이 고칠 수 있겠다고 말하고 정말 고쳐주었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시계를 새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코리는 “아빠, 시계를 팔았어야지. 우리에겐 돈이 필요하잖아!”라고 아빠를 야단쳤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주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라.”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인데 세상은 누구도 진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립니다. 이미 뱀인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나가 흔들리면 감정도 흔들립니다. 세상에 속하기 위해 뱀을 선택한 이는 결국 세상이 주는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합니다. 뱀을 선택한 즉시 관계의 단절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나를 버렸기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에 영향을 주는 분이 되실 것이고 세상은 더는 ‘나’에게 영향을 주는 대상이 아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 내적인 사람이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릅쓰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지만 기뻐하셨지, 두려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엘리사벳에게 가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지만, 인간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옥사나 말라야가 본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면 개들과 관계가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전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개가 나를 보고 짖는다고 화가 나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간 적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그런 수준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나’가 그 누군가와 같은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날아가는 새에게 쥐가 욕을 해도 새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그러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쁨은 세상의 휘둘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창조적 근심

 

오늘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근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제게는 근심은 해도 되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말라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근심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은 나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좋을 것이 없지만, 근심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기쁨이든 자녀든 뭔가를 낳는 창조적 근심도 있지요.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근심스러운 일은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닙니다. 생산적인 근심은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감수해야겠지요.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두 상반된 부류가 있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과 근심은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어제오늘의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우울증과 같이 병증을 띄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요즘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자식에 대한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그렇게 쓸데없는 근심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그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고, 그러니 하시지 말라는 제 말이 어쩌면 쓸데없는 말이었지요. 

그러므로 근심은 그 자체로 나쁘거나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는 근심이 나쁘고, 사랑이 없어 병증일 뿐인 근심이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이를 낳는 어미의 근심과 같은 근심은 많아져야지요. 요즘 아이를 낳는 고통과 키우는 고통이 싫거나 두려워 아이 대신 강아지를 키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근심은 사람에게서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즘의 더 큰 문제는 사랑은 없고 두려움은 커져 근심할 줄 모르고 근심은 접근조차 못 하게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래서 고통을 줄 것 같으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성가실 것 같으면 그런 일은 아예 거부하고 근심거리들은 애초에 싹둑 잘라버리지만, 그 바람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아이 낳을 근심은 아이 낳을 고통을 감수한 창조적 사랑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아이를 얻는 기쁨을 알고 감히 도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영적인 출산의 근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거룩한 일에 감히 도전하는 우리에게는 창조적인 근심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언제나 진통의 시간과 완성의 시간이 있습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이며 몰려드는 애통의 시간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사랑의 아픈 시작입니다. 십자가로 십자가를 벗어나고 십자가로 사랑에 도달합니다. 

사랑과 십자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가야할 때를 아시기에 함께했던 기쁨과 다시 만날 기쁨은 빼앗지 못할 기쁨이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주님의 뜻과 하나로 결합되는 환상이 아닌 실체입니다. 

주님의 기쁨 안에 소중한 우리가 있습니다. 어김없이 빼앗지 못할 기쁨을 출산하시는 우리의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기쁨의 실체가 다름아닌 십자가임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십자가가 탄생이며 만남이며 봉헌이며 사랑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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