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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0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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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하느님,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에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2023년 4월 5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마태 26,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마태 26,24)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0,4-9ㄴ)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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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

 

 

복음
마태오 26장 14-25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5일 (수)
김아론 아론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2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5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46

📌 강론시작 13:5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5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7

📌 강론시작 08:3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5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36

📌 미사시작 1:01:22

📌 강론시작 1:09:3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오늘 복음의 중심 인물은 ‘유다’입니다.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요한 복음 전승과 비교할 때(어제 복음 참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유다의 배반 예고는 앞선 예수님의 죽음 예고(26,1-2 참조),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26,3-5 참조), 장례 준비를 위한 여인의 도유(26,6-13 참조)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는 마태오의 수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곡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줄 알고 계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불행 선언을 통하여 당신을 배신할 유다에게 당신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우십니다.

유다는 이에 앞서 수석 사제들과 모의하였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치유 기적을 지켜보고도 돈을 받고 그분을 팔아넘기려 하였습니다. 유다는 탐욕에 빠져 눈이 멀었고,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위하여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사용하였던 베타니아 출신의 여인과 대조를 이룹니다(26,6-13 참조). 

그럼에도 유다는 자신의 의도를 예수님 앞에서 숨기려고 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한 유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는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탐욕에 빠져 예수님을 돈과 바꾸려고 하였던 유다의 잘못을 우리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고 보여 주신 것이 소중하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배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결혼 생활 20년이 된 중년의 부인이 있습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늘 바빠서 함께 하기 힘들고, 그래도 자녀 때문에 산다고 했는데 자녀 역시 어느 순간 “내가 알아서 할게”라면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도 20년 동안 가정만을 지켰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경력 단절이 있는 자신을 어느 회사에서도 채용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무료한 일상 안에서 친구가 여행을 제한합니다. 그것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해외를 말이지요. 
 
남편에게 이 여행에 대해 말하니, “그럼 나는 누가 밥해줘? 애들은 누가 챙겨?”라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화가 나서 무작정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는 밥이나 해주고 청소, 빨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여행을 통해 이 여인은 자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해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에게도 휴가가 필요해. 살갗에 햇볕을 느낄 필요가 있어.”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행 전에는 자기 생각만 하던 여자가 드디어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화가 아닌, 어느 책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이 비로소 남도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인상 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 역시 제대로 볼 수 없고 당연히 주님의 사랑도 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이로써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도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잘 알고 계셨지요. 사랑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할지도 당연히 잘 알고 계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짐짓 자신은 주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마음은 유다 이스카리옷도 처음에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길 마음을 품습니다. 은돈 서른 닢은 당시 노예의 가격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노예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존재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뻔뻔하게 묻습니다. 
 
죄로 쉽게 기울어질 수 있는 자신을 몰랐기에,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었기에 그는 커다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섬기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느님은 일을 하실 때 조금도 서두르지 않으신다.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다.

- 카를로 카레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제자가 되려는 신앙인? 신앙인이 되려는 제자!

 

요즘 수많은 사이비 교주에 관한 내용을 심심치 않게 뉴스에서 보곤 합니다. 이들도 이스카리옷 유다와 마찬가지의 길을 간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했지만, 점점 자기를 들어높이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신천지의 이만희 씨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교라는 이단을 창설한 박태선 장로의 이력을 살펴봅시다. 그는 유년기부터 교회 주일 학교에서 교리를 배웠습니다. 서울 남대문 교회에서 집사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48년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창동교회에서 장로가 된 박태선은 1955년부터 부흥 집회의 부흥사로 활동합니다. 이때 TV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이 그의 부흥 집회에 몰려듭니다. 박 장로는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어버리고 자신이 믿어오던 교회가 오히려 악한 집단이라고 매도합니다. 

1956년 자신을 새로운 하느님처럼 추앙하게 하고 여러 곳에 신앙촌을 설립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대기업처럼 엄청난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재물과 교만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쨌건 그는 성경까지 바꿔가며 천부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신앙촌에 불이 났습니다. 그곳에 살던 이만희 씨의 집은 불타지 않았지만, 자신의 병도 치유되지 않는 것 같고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그 집단에서 탈출하고 결국엔 자신이 보고 배운 대로 새로운 종교를 만듭니다. 이것이 신천지이고 이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가 듣는 가운데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질문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유다도 그렇게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어떻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기본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이란 제자이기 이전에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삼구와 싸우는 사순절을 사는 사람이고 제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유다는 사순의 의미를 잊고, 곧 신앙인임을 망각하고 제자만 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구와의 싸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왜 재물에 대한 욕구와 싸워야 하는지, 왜 먹고 마시는 것과 성적 욕구와 싸워야 하는지, 왜 자신을 죽이고 겸손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잊고 선교나 봉사에 관한 것만 가르친다면 지금 교회도 역시 새로운 유다들을 양산하게 되어있습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더 큰 신앙인이 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삼구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이단처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신천지는 선교를 강조합니다. 모두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육신-마귀는 강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숨기도록 하는 삼구를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무엇을 못 박아야 하는지 모르면 신앙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40을 의미하고 40위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유혹, 곧 탐욕-성욕-지배욕입니다. 이것을 한다면 신앙인입니다. 이것 없이 복음만 전하려고 하면 태어나지 않았음이 더 좋았을 법한 종교인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는 법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성주간 독서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오늘은 세 번째 노래로서 제자의 귀와 혀에 관해 얘기합니다. 

제자의 혀란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혀인데 하느님께서 그런 혀를 주신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의 귀에 관한 얘기는 이해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귀를 가진 사람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말이나 더 나아가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자의 귀를 가지면 어찌 거역하지 않고, 어찌 수치나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겁니까? 

즉시 떠오르는 말이 귀가 순하다는 뜻으로 공자가 가르친 이순(耳順)입니다. 귀가 순하다는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도 거역치 않고 순히 듣는다는 뜻일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고 한 말과 같은 뜻이겠고요. 

물론 아무 말이나 순히 듣는 것이 아닐 것이고, 주님의 말씀만 순히 듣는다는 뜻이겠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들으려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이것 절대 쉬운 것이 아닌데 그래도 하느님께서 귀를 일깨우시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고 이해도 되지만, 그다음 단계 곧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난해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정말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을 주님께서 없애주시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자를 주님께서 없애주신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내맡긴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와주시길래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사랑하면 모욕과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이제 어떻게든 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는 곱던 얼굴이 망가질 정도로 시장에서 장사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강아지 소리 들으며 딸 고쳐주려던 이방 여인도 수치 당하지 않았지요. 

사랑하면 나의 시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있기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수치에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한 것이고 사랑으로 한 것이지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동냥에 대해 얘기할 때 오늘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그도 처음 동냥하러 다닐 때는 부끄러워했는데 극복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들은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주님께서 ‘차돌처럼 당신 얼굴빛 변치 않으셨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욕을 줄 때, 그 받은 모욕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큰 영예를 받게 될 것이니, 그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모욕은, 모욕을 받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탓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시선이 모욕하는 사람에게 가 있지 않고, 주님께 가 있는 것이며 사랑하는 주님이 옆에 계시면 부끄러울 것도 모욕당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역시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모욕당하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아직도 우리는 주님을 모릅니다. 주님을 모르기에 우리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괴롭고 슬픈 우리들 자화상입니다. 믿음은 더디고 배신은 너무 빠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설픈 우리들을 생각하시고 우리는 물질만을 늘 생각합니다. 허망한 것들만을 부여잡다 떠나는 우리들 삶입니다. 

모든 배신의 시작에는 언제나 욕심이 있습니다. 물질에 갇혀 한 발자국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은 너무나 빨리 사라집니다. 나의 뜻인 욕심을 내려놓기가 이리도 힘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욕심과 배신을 끌어안고 우십니다. 

욕심은 믿음이 아니고 배신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의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의 따뜻한 사랑입니다. 성당에서도 보게 되는 욕심의 그림자들입니다. 이 성주간이 주님의 뜻을 위해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비움의 성주간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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