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박해하는 적에게 저를 넘기지 마소서. 거짓 증인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나 사악한 거짓을 내뱉나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주님 수난의 성사에 끝까지 함께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소서.
2023년 4월 4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내 말을 들어라. 귀를 기울여라. (이사야서 49장 1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49,1-6)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오늘 복음
(요한 13,21ㄴ-33.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은 아버지께 순종하셨나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시나이다.
복음
요한 13장 21ㄴ-33.36-38절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4일 (화)
이정훈 클레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8:3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4일 (화)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51
📌 강론시작 18:1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4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1
📌 강론시작 07:1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4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00
📌 미사시작 1:00:23
📌 강론시작 1:07:51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신 예수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장면에 이어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3장 참조). 특별히 유다의 배신 예고(13,21ㄴ-30 참조)와 베드로의 배신 예고(13,31-33.36-38 참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오늘 복음은 ‘성주간 화요일’이라는 전례 시기가 고려된 결과로 보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고됩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신할 제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감히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유다에게 적신 빵을 건네시는데, 이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옵니다. 유다는 사탄에 이끌려 다른 제자들과도 관계를 끊어 버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떠나 어둠과 죄가 지배하는 ‘밤’으로 들어갑니다(8,12 참조).
베드로의 배신 또한 예수님의 예고로 이루어집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고는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과 맞물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로 말미암아 제자들과도 이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에 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게 될 이유도 저마다 달랐지만, 예고에 따른 결과도 달랐습니다. 유다는 결국 사탄의 이끌림에 예수님의 ‘배반자’가 되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 탓’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
손주를 돌보는 어느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제 손주가 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요.”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갓난아기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갓난아기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자자체에서 출산지원금, 육아지원금 등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액수도 생각보다 상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출산율이 전 세계에서 최저라는 사실이 이상했습니다.
그 뒤, 젊은 부부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이 부분에 관해 물었습니다. 국가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을 하고 있는데도 왜 아기를 갖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런 현금성 지원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을 해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출산 이후 육아에 힘을 쏟으면서 직장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출산 휴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데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면 나중에 경력 단절로 재취업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 자녀를 키우는데 예전과 달리 많은 교육이 필요한데, 직장까지 잃게 되면 모두 불행해질 것 같아서 아이를 낳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잘 몰랐음을 인정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애를 낳고 키운 적도 없기에 그냥 간단하게만 생각했었습니다. 잘 모르면서도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면서 부부들에게 그 탓을 돌렸던 것입니다. 인구 절벽을 만든 것은 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책임일 텐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당사자 탓을 하면 안 되었습니다.
‘남 탓’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였습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착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책임이 없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 상황에 놓이면 똑같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수난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붙잡혀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모두 잘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누가 당신을 팔아넘길 줄도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말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사랑을 많이 받았던 제자들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숨 쉬며 사는 것만으로도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모습을 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을 팔아넘기는 것이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만이 아닌 수십 번을 말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자신을 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남 탓이 아닌, 자신이 지금 실천해야 할 주님의 뜻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께 아픔을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위대한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위대한 사랑으로 행한 작은 행동들이 있을 뿐이다.
- 테레사 수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옥에 가도 이것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상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스카리옷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빵을 적셔 준 다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차피 사탄이 그의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그를 막아봐야 소용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사도가 알아듣게 “가서 날 팔아넘겨라” 하고 말씀하셨다면 다른 사도들은 살인과 폭행의 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만 지옥에 떨어지도록 놓아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것이 되면 사람은 더 이상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노예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손을 내밀 때 자신에게 그것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사탄의 편에 섰고 더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빠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세상, 곧 지옥에 빠지게 될 때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 집착하는 것 외에 가장 큰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지옥에서도 이것만 할 수 있다면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의 교만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유튜브에 보면 빌 와이즈라는 분이 23분간 지옥에 다녀온 뒤에 한 간증 내용이 있습니다. 지옥 간증은 수없이 많은데 이분의 간증에 신빙성이 느껴지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오류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간증하는 지옥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사실 성경에 다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빌이 그 단 1분도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지옥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아니면 모두가 지옥이었음이 믿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이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자녀 중에도 이 장소가 실제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녀가 있다.”
빌은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지옥을 믿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빌은 또 물었습니다.
“주님, 왜 이러한 생물들이 저를 이처럼 지독히 싫어합니까?”
주님은 그것은 그가 주님에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싫어한다. 악마는 하나님을 대항해서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단다. 악마는 하나님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그러나 악마는 하느님의 창조물에 해를 입힐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왜 악마가 인류를 싫어하며 속이고 지옥에 데려가고 병들게 하며 하느님의 창조물에 해를 입히기 위해 어떤 것이든지 하는 이유이다.”
빌이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때는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어마어마한 마귀들이 개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 쟤들 좀 보세요! 하! 개미네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넌 그들을 단지 내 이름으로 묶어서 쫓아내면 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권능의 차이입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에게 권능을 주는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누군가의 힘을 인정한다는 말은 누군가의 도움을 청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청하기도 합니다. 사탄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돈과 쾌락과 교만함을 섬기는 일입니다. 반대로 주님께 도움을 청한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옥에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사탄의 힘에 나의 모든 권는을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빌 와이즈에 따르면 주님은 지옥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을 차단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면 주님을 찾았을 것이고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절망감. 그 절망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지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1%도 없는 절대적인 절망 그 자체입니다. 누구도 와서 나를 도와줄 수 없는 곳입니다.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절망감이 지옥에서 경험한 가장 끔찍한 고통입니다. 즉 지옥이 끔찍한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본성에서 완전히 제외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힘을 부인한 자들의 처소입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이분이 저에게 그가 진짜 지옥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믿게 했습니다. 지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을 너무 믿지 않아서 기도를 청하지 않다가 결국 자신이 믿었던 사탄의 힘에만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한 번에 이 믿음이 변할 수 없고 사탄의 힘에 완전히 의지한 자는 하느님께 청할 능력을 잃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지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탄에게 힘을 실어주다보면 지옥에 갑니다. 지옥에서 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없을까요? 사탄에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바람의 에너지를 사탄의 자비를 청하는 데 쓰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사탄에게 사로잡힌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힘의 싸움입니다. 처음엔 자기에게 청하며, 그다음엔 세상에, 그리고 결국엔 사탄에게 청하며 하느님께는 청할 에너지가 남지 않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손을 떨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닌 마약상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청할 에너지가 없어 결국엔 빠져나올 수 없는 곳, 그곳이 지옥입니다. 반면 하느님께 청하는 이들은 죽음으로 위협하는 사탄을 개미처럼 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 앞에 죽음은 그저 한숨의 잠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기도할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배반의 차이, 믿어주실 거라고 믿는 나인가?
주님께서는 오늘 심란하십니다. 그리고 심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당신 죽음 때문에 심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 때문일 것이고 배반 때문일 겁니다.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이 돌아가시게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계셨고 세 차례나 예고하셨던 바지만 당신 죽음에 제자들도 휩쓸려 배반하게 되어 심란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배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적극적 배반과 소극적 배신의 차이입니다.
배반과 배신은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배반이 한편이었다가 다른 편이 되는 일반적인 의미라면 배신은 배반 중에서도 믿었던 사람이 배반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적극적인 배반이고 주님의 죽음에 적극 가담한 것이긴 하지만 주님의 믿음을 기준으로 보면 베드로의 배신에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유다보다 베드로를 더 믿으셨다고 하면 베드로가 비록 주님의 죽음에 직접 또 적극 가담한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믿음이 배신당한 것이기에 더 마음 아프셨고 더 심란하셨을 겁니다.
‘믿었던 너마저!’라는 말이 딱 이 경우지요. 그래서 여기서 생각게 됩니다.
주님께 나는 베드로일까 유다일까? 나는 주님께서 유다처럼 당신 믿음에서 아예 제쳐놓은 자인가? 그래도 베드로처럼 믿을만한 놈이라고 쳐주시는 존재인가?
나는 주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고 믿는가,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은 존재라고 믿는가?
당신 믿음에서 나를 제쳐놓았다면 저는 실망할 것이고 당신 사랑에서 배제된 것처럼 느껴져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수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믿어주실 것이고 다시 믿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다시 안 믿어주실 거라고 믿고, 주님 사랑에서 영원히 배제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마도 유다처럼 절망하여 자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을 수없이 배신해도 주님은 나를 믿어주실 거라고, 베드로처럼 언젠가 당신께 돌아올 것을 믿어주실 거라고 믿어야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진 자라야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배신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팔아 넘기고 하느님마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우리의 교만이 집어삼킨 아프고 아픈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맹세도 무엇 하나 지킬 수 없습니다. 너무 쉽게 망각하고 너무 자주 파기하는 배신의 일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우리의 배신이 사랑받아야 할 예수님을 찌릅니다. 배신의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아프게도 따뜻하십니다. 하느님을 팔아 욕망을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용서의 외상장부가 새벽 닭의 울음소리처럼 아프게 우리를 찌릅니다. 아무리 팔고 사는 것에 익숙한 자본주의이지만 팔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홀로 이 긴 시간을 건너가십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사랑해야 할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도하며 사랑하는 성주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04/06 (목) 성목요일 미사 생중계 평화방송 명동성당 (0) | 2023.04.06 |
---|---|
23/04/06 (목) 성유축성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0) | 2023.04.06 |
23/04/0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04.05 |
23/04/0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04.03 |
23/04/02 (일) 성지주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04.02 |
23/04/0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04.01 |
23/03/3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3.03.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