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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31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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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리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에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

 

2023년 3월 31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요한 10,38)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요한 10,38)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예레미야서 20,10-13)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31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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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요한 10장 31-42절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31일 (금)
전진 도미니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5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31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8

📌 강론시작 15:5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31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8

📌 강론시작 07:5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31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45

📌 미사시작 1:04:17

📌 강론시작 1:11:4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신비와 이해를 잇는 통로는 믿음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태도는 점점 격해집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설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그리스도의 강생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느님이시면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유다인들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십니다. 사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온전한 사람이 되실 수 있으며, 어찌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신비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완전한 이해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때 신비와 이해를 잇는 통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논쟁은 믿지 않는 이들의 예를 보여 주면서 한편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당시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 줍니다.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이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과 함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여러 증언으로 끊임없이 알려 줍니다. 

복음을 읽는 이들은 어느 순간 멈추어 서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또는 어떤 분이신지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답을 우리는 신앙 고백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드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을 갖춘 사람

 

학창 시절 저의 지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단거리 달리기는 반 계주 대표로 나갈 만큼 빨랐지만, 1Km 이상은 좋은 성적을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던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한 뒤, 학교 축제 때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전교생이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 5등까지 주어지는 상품도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장거리 달리기에서 좋은 성적을 얻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마라톤이 시작되었습니다. 완주만 해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름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스만 돌면 결승선이었습니다. 완주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성적은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5등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상도 없으니 속도를 줄여 그냥 걸었습니다. 몇 명이 저를 앞질러 갔습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습니다. 저의 목표는 완주였기 때문입니다.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결승선에서는 들어온 순서에 맞춰서 등수를 알려주었습니다. 글쎄 저의 등수가 8등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코스 전에 제 앞으로 많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열심히 달렸으면 충분히 5등 안에도 들어올 수 있었는데 포기했던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레짐작으로 이제 틀렸다고 판단하면서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판단만을 내세워서 포기합니다. 어떻게든 힘을 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 쉽게 포기하고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야 하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유다인들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즉,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하느님을 찾았고, 메시아가 오시길 간절하게 빌었으면서도,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 간절함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만 하느님의 이 놀라운 신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관점만을 내세우면서 주님을 보고도 쉽게 포기합니다. 주님을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관점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을 갖춘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립이 아니라 고독을 사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예언자 예레미야와 주님은 반대자들에게 둘러싸이고, 박해자들로부터 죽임당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마르고 미싸빕'이 뜻하듯 예레미야는 완전 사면초가이고, 고립 상태입니다. 주님도 지금은 제자들이 옆에 있지만, 곧 사면초가, 고립 상태가 될 것입니다. 

고립이란 고독과 다릅니다. 고립이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외부와 단절된 폐쇄 상태를 뜻한다면 고독은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곧 내 옆에 누가 있더라도 혼자인 상태이거나 혼자임을 느끼는 상태를 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처럼 깨달은 사람이나 심리 정신적으로 강건한 사람은 옆에 사람이 많거나 적거나 본래 나는 혼자라는 것을 알고 고립을 살지 않고 절대고독을 살아낼 줄 알지요. 

그렇습니다. 자폐적 고립이든 집단 따돌림에 의한 고립이든 우리는 고립을 살지 말아야 하지만 고독은 고독할 줄 모르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살아야 하고, 특히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인 의미의 고독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고독이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고독이요 하느님을 만나는 고독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레미야나 주님처럼 반대자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리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는 단절되었을 때 고립되지 말고 영적 고독으로 승화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자의 포위가 좁혀올 때 하늘로 오르는 것이지요. 전후좌우가 막히면 위로 뚫고 올라야 하듯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처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고, 예레미야처럼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곁에 계심을” 느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우리의 집착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차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내면에는 집착의 씨앗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믿음 속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만큼 낮추고 낮아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낮아져야 더 큰 것을 들을 수 있고 더 높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말없는 삶의 실천이 오히려 반듯한 길잡이며 이정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게 하십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묶고 있는 집착의 끈을 풀고 하느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집착과 구원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가 복음이며 진리입니다.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이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욕심에서 벗어나 서로를 올바르게 변화시킵니다. 기존의 것들을 비워야 제대로 믿을 수 있는 복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십니다. 집착과 조급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인격을 반성하는 사순의 끝자락입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 신앙의 참된 바탕임을 다시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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