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성난 민족들에게서 저를 구하시고, 제게 맞서 일어선 자들에게서 들어 높이셨으며, 포악한 자들에게서 구출하셨나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참회의 생활로 거룩해진 자녀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2023년 3월 29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다니엘서 3,14-20.91-92.95)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오늘 복음
(요한 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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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복음
요한 8장 31-42절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29일 (수)
최철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29일 (수)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4
📌 강론시작 19:3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9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2
📌 강론시작 08:1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9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05
📌 미사시작 1:03:09
📌 강론시작 1:11:0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해.
오늘은 진리와 관련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진리가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내 안에 머무는 것’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그것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이 모두 진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것,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 말씀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결국 진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전해지는 아버지의 뜻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진리에 관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고소처럼 정말 예수님께서 임금이신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업적을 통하여 드러나기에 예수님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예수님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꼰대 패션 탈출법
‘꼰대 패션 탈출법’이라는 이상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패션은 ‘꼰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다. 패션은 자유이지만, 꼰대의 성향상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행에 뒤처진 헐렁한 슈트도 모자라, 와이셔츠 안에 메리야스를 받쳐 입고 하얀 양말까지 고수한다면 꼰대일 확률이 높다. 신발이 안 보일 정도로 길이가 긴 바지를 선호한다거나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매치해야 직성이 풀린다면 100% 꼰대다. 자신의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 따르면 저는 확실히 ‘꼰대’였습니다. 그냥 저 편한 대로 입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특별히 잘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제 맘이 가는 대로 특히 편한 복장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와이셔츠(끌러지 셔츠) 안에 메리아스는 반드시 입어야 하고, 청바지, 면바지 등 캐쥬얼 차림에도 정장 구두를 신기도 하고, 제 체형보다 큰 크기의 옷을 선호합니다.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꼰대 패션 탈출법’에 의하면 저는 분명히 ‘꼰대’였습니다.
솔직히 패션은 자유라면서도 다른 이의 패션을 평가하는 것이 더 ‘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이 꼰대일 것으로 판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다양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기준만 맞다고 생각하면 다 꼰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모의 말을 꼰대 같다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 자녀 역시 꼰대입니다. 꼰대를 싫어한다면서도 자신이 꼰대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유다인이 주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자기 기준에서 벗어난다면서 틀렸다고 하고, 자기들을 비판한다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꼰대’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통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이 될 뿐입니다(요한 8,32 참조).
주님의 뜻이 때로는 우리에게 커다란 걸림돌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꼰대’에서 벗어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최고가 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세요. 이것이 바로 현재 제가 사는 방식이랍니다.
- 오프라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는 이유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 중 60명 정원인 배에 피란민 1만 4,000명을 구한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의 시복시성이 추진됩니다. 라루 선장은 전쟁을 겪은 뒤인 1954년 20년간 생활한 바다를 등지고 마리누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베네딕도회에 들어갑니다.
12월 23일 흥남 부두를 떠난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수많은 기뢰가 있던 동해를 항해했지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주님 성탄 대축일인 25일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렀습니다.
항해하는 이틀 동안 배 안에서 아기 5명이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구조된 1만4000명의 후손은 현재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문재인(티모테오) 대통령의 부모도 이 배를 타고 거제도에 왔었습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수도원에 들어갔을까요? 이웃 사랑을 포기한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새로 정해야 합니다. 부모는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따라서 사춘기까지 육체적인 부모가 생존만을 강조했다면 사춘기가 된 아이는 이제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과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론이 자기 삶의 방식과 맞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를 원할 때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되자 그렇게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원의가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의 대로 아버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이나 윤회설, 연기설 등이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찾는 창조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도 다 창조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을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따릅니다. 자연의 이치는 생존입니다. 하지만 나의 생존은 역시 정글의 법칙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법칙입니다.
생존욕구는 사랑과 반대됩니다. 결국 인간이 믿는 아버지는 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나 아니면, 자연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였다면 하느님은 부모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춘기가 되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게 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싶은 사람들은 그것을 적합하게 해 주는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자연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창조론처럼 증명될 수 없습니다. 그저 각자가 자기 삶의 방식을 정당하게 해 줄 아버지를 찾는 방식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는 결단, 그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거짓이 됩니다. 실제로는 내가 섬기는 사탄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이용하게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기 전에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내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거짓은 나를 관계의 행복보다는 생존의 행복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에게 친구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사춘기가 되어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며 살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새로운 아버지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여 그 뜻을 따르게 되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서 그분을 아버지로 선택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람이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전에 말씀드린 바 있어 제가 어떻게 강론을 준비하는지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새벽 강론을 올린 다음 바로 다음 날 독서와 복음을 읽고 하루 내내 독서와 복음을 가지고 묵상하고 다음 날 새벽 강론을 완성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제도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주제를 자유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는데 어제 안 보이던 나무의 새순들이 보였고, 순간 ‘나무는 자유롭고 꽃은 자유로운가?’하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무와 꽃은 자유롭지 않고 자유가 없다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나오고 싶을 때 나오고 싫으면 나오지 않을 수 있지만, 나무는 자기가 내고 싶을 때 새순을 낼 수 없고, 꽃은 자기가 피고 싶을 때 필 수 없으며, 사람이 머리를 물들이듯 꽃이 다른 색 꽃을 피울 수 없잖아요?
정해진 때에 피고,
정해진 모습을 핍니다.
그대로 피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라고 하지 않고 돌연변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샛노란 개나리와 수선화꽃이.
야리야리 연보라 진달래꽃이.
귀부인 목련꽃은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아름다운 머리를 괴상하게 물들이기도 하지만 비구니의 머리처럼 파르라니 삭발할 수도 있지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옷으로 숨기려 했지만 요한처럼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을 수도 있고, 회개하는 사람들처럼 회색 옷을 입을 수도 있지요.
꽃은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여 아름답지만 사람은 죄지을 자유로 사랑하니 아름답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자유로 사랑하는 것도 아름답다는 말이고, 자유로 진리에 순종하고 자유로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더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뜨거운 불가마도 그들을 가두거나 억누를 수 없었고, 불가마 안에서 주님과 자유로이 거닐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 안에 머물면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사랑으로 더 자유로운 우리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죄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입니다. 자유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받는 새로운 삶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 때의 원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자유보다 사람을 더 사람이게 하는 가치도 없습니다. 사람을 더 사람이게 하는 인격적인 가치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참된 자유 참된 진리입니다.
참된 자유이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본질이 되시는 하느님의 것을 만나게 합니다. 왜곡된 자아를 치유하는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껴안고 통합합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과 한마음으로 통하는 자유입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새로운 해방을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실천하십니다.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공헌한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뜨겁게 체험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사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자유인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욕망과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참된 자유입니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내맡기는 진리를 걸어갑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는 진리를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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