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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28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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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주님, 저희가 한결같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기는 백성이 많아지고 그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게 하소서.

 

2023년 3월 28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 8,28)

 

십자가와 하늘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민수기 21,4-9)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요한 8,21-30)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28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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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복음
요한 8장 21-30절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28일 (화)
김여욱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28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56

📌 강론시작 16:3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8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6

📌 강론시작 06:4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8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42

📌 미사시작 1:03:32

📌 강론시작 1:10:5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앎과 알지 못함, 믿음과 믿지 못함. 요한 복음은 이 주제를 빛과 어둠의 대조로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상반된 주제 사이에는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던지는 질문처럼 예수님의 신원이 자리합니다. 

“당신이 누구요?” 

요한 복음의 내용은 마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사실 요한 복음의 시작도 이렇습니다.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말씀, 곧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부터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은 여전히 예수님께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요한 20,31)을 다양한 표징과 사건으로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하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파견으로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보내신 분의 뜻에 따라 충실히 모든 일을 수행하시고,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가르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오셨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파견되신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마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위로, 하늘로,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실 구원 업적의 절정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고 그분을 믿으라고 요청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이 알아주는 삶이 아닌 내가 알아주는 삶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잠시 뒤, 저를 보며 직원이 “커피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잘못된 표현입니다.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물건을 과도하게 높이는 말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왜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며 화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표현임을 알면서도 이상한 존댓말을 쓴다고 하더군요. ‘손님은 왕’이니까 손님이 원하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마트에 가니, 코로나 규제가 완화되면서 다시 시식 코너가 생겼습니다. 이 코너의 직원이 제게 “한 번 드셔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과도한 높임말입니다. 서술어가 둘 이상 이어질 때는 맨 마지막 서술어만 높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들어보세요. 먹어보세요.’가 맞습니다. 
 
다른 이에게 존중받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어에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존중받아야만 해야 할까요? 어린이들은 때로 어른에게 반말로 말합니다. 아직 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어른은 화내지 않습니다. 어려서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화내며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존중받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존중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진상, 꼰대’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겉으로만 존중받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존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더 겸손한 삶이 요구됩니다. 남이 알아주는 삶이 아닌 내가 알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겸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굳게 믿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 가지고 있는 교만의 마음으로 인해, 알아듣지 못합니다. 자기 생명까지 내놓으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주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서, 의심과 불신으로 주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겸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일상 삶 안에서 충분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겸손의 덕을 갖추고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죄 속에 죽는 삶이 아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선한 삶은 방대한 지식에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

- 조지 허버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누구인지는 잠들기 직전, 이 한마디로 드러난다.

 

일본군 성노예로 8년을 살다가 일본의 말도 안 되는 발뺌을 보고는 제일 먼저 당신이 위안부였다고 선언하며 나서신 ‘김복동’ 할머니가 계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평생을 ‘피해자’로 살다가 ‘인권운동가’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당신의 삶에 후회가 없으신 것입니다. 

처음 위안부임을 누구에게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결혼하고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그 가당치도 않은 부끄러움은 오로지 당신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런 피해자라는 신분에만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과 같이 피해를 본 이들이 아무런 보상과 사과를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고 일본은 위안부나 강제 집용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자의로 한 것이라는 망언을 내놓고 있었고 일본 젊은이들은 전쟁으로 우리나라에 피해를 준 사례가 하나도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제 피해자라는 신분을 넘어서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더는 힘이 없어, 또 침략받게 만들지 않으려고 장학 재단을 세우고 거대한 세력과 투쟁을 하였습니다. 

이분들처럼 어떠한 소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 나라에서까지 일본이 화해하자고 한 것을 사과한 것이라 여기고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사과도 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단지 돈만을 원한 것처럼 돈을 주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처리해버립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돌아가시며 “일본 놈들 해도 너무 하네!”라고 하셨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라도 끝까지 사과받아내려고 한 소명을 가지고 사셨던 김복동 할머니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인권운동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는 우리가 당신을 십자가에 들어올린 다음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해자라고 그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야 그분들이 피해자가 아닌 인권을 위해 싸우신 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끝까지 소명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소명’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든 누구의 소명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자녀는 사탄의 소명을, 하느님 자녀는 하느님 소명을 실천합니다. 사탄의 자녀 소명은 거짓으로 하느님과 세상과 자신을 속이려 하며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합니다. 

하느님 자녀는 진리를 추구하며 하느님의 소명인 ‘사랑’을 실천합니다. 사랑은 나의 피를 내어주는 십자가의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우리를 하느님이라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의 소명을 당신 성령을 통해 부활로 확증해주십니다. 그 이전에도 예수님 스스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증하시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십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하루 종일 목숨을 바치는 것과 같은 십자가의 삶을 살고 그 누군가가 편안히 쉬는 모습을 보며 기쁨에 잠겨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부모’일 가능성이 큽니다. 부모는 자신의 소명인 십자가의 삶을 다 살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습니다. 그 뿌듯한 마음으로 “다 이루었다”라며 잠자리에 듭니다. 

기쁘게 내어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거짓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우리도 소명으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마지막 말씀을 되새깁시다. 마지막 때 하신 이 한 말씀이 그분을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 

 

죽었다가 사는 법을 얘기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이지만 오늘 주제를 약간 빗겨나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독서가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서 잠재우시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이 짧은 얘기에 불평불만의 원인과 처방이 있습니다. 우선 불평불만의 원인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이 그들에게 보잘것없어 보이고, 심지어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원하는 양식이 없고 충분한 물이 없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불만이 보통 그렇습니다. 이것이 있는데 저것을 원하니 이것이 불만이고, 이만큼 있는데 저만큼 있기를 바라니 이만큼이 불만이지요. 있는 것은 만족치 않고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의 문제이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욕심 곧 ‘더’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또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고 불평까지 할 경우, 이에 직방인 처방이 바로 극약처방이고 최악 처방입니다. 

지금까지 백성의 요구와 불평을 들어주신 하느님께서.불평이 이렇게 계속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으시고 이번에는 죽음이라는 최악을 극약처방 하십니다. 

죽음이라는 최악을 생각하면 죽음만 아니어도 다 악이 아니고 선이 되지요.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는 만 원도 큰돈인 것과 같습니다. 

최악이란 최선의 반대이며 선은 하나도 없고 악뿐인 상탭니다. 죽게 되면 사실 존재 자체가 사라질 판이니, 욕망은 사치이고 그래서 욕망도 사라지겠지요. 

그러므로 행복하려면 우리는 스스로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의해 최악을 맞이하고 하느님께 간청해 살 수 있는 처방을 겨우 얻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행복하려면 우리는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 욕망을 내려놓고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합시다. 사랑에는 최선을 다하고, 욕망에는 최악을 각오합시다. 이렇게 하여 불평불만은 잠재우고 행복을 요즘 봄날처럼 꽃피웁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을 것이다.

 

예수님의 들어 올려진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십자가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십자가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신 따뜻하신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신지에 대한 참혹한 무지(無知)를 아프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무지까지 따뜻이 감싸줍니다. 

우리를 끝내 저버리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생명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실천 앞에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 쪽에 서 있는 지 죽이는 죽음 쪽에 서 있는 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삶은 바로 죽음입니다. 생명의 길은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는 우리의 얇고 얇은 인격을 비춥니다. 너무도 빠르게 너무도 쉽게 십자가의 빛을 잃어 갑니다. 다시 우리의 생활에 밝은 빛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들어 올려집니다. 들어 올려진 십자가가 생명의 길을 밝힙니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사랑의 신비이며 지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배우는 사랑이며 빛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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