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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2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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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짓밟는 사람들이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르나이다.

하느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으로 온갖 복을 내려 주시니 저희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2023년 3월 27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다니엘서 13,1-9.15-17.19-30.33-62)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2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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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복음
요한 8장 1-11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27일 (월)
최철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4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27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9

📌 강론시작 20:58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7일 (월)
팔로티회 홍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8:4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7일 (월)
팔로티회 분당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6:40

📌 강론시작 1:07:2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수산나와 두 원로의 이야기에서 수산나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증언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 원로는 둘이나 셋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의 요건을 채웠습니다. 

수산나는 영락없이 죽임당할 처지에 놓입니다. 여기에서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는 십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증언은 단순한 거짓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앞세워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물론 이들은 율법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간음과 관련하여 죄를 지은 경우에 당사자 두 명 모두, 곧 남자와 여자 둘 다 죽여야 한다고 언급합니다(신명 22,22-24 참조). 

그런데 지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자만 단죄하려고 합니다. 율법을 적용하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수산나의 경우와 비슷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렇듯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단죄보다는 화해와 용서가 먼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사할 일은 계속된다

 

저는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 머리 나쁜 저 자신을 탓하곤 했는지 모릅니다. 육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부모님의 좋은 유전자를 받지 못한 것 같았고, 대신 그 좋은 유전자는 모두 제 위의 형과 누나들에게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머리 나쁜 제가 과연 신부로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의심했었습니다. 
 
지금도 당연히 머리는 좋지 않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 역시 잘 외우지 못합니다. 약속도 자주 잊어버려서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한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신부로 사는 제게 사람들은 저의 머리가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외워서 하고 있고 긴 시간의 강의 때도 거의 원고 없이 한다면서, 머리가 나쁜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부분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강론이나 강의 원고를 외우고 기억할 수 있는 머리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습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통해 집중해서 신부로 기쁘게 살 수 있고, 부족한 몸으로도 하느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저를 그래도 쓸모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투성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한 이유를 찾는데 더 힘을 기울이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감사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기 삶을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감사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도 주님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율법을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할지, 아니면 용서해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용서해야 한다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면서 고소할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강조했던 사랑은 어디 있냐고 따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는 권한은 죄 없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큰 용서를 받은 이 여인은 어떠했을까요? 큰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사할 일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우리의 많은 죄에도 계속 용서해주시면서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감사함을 통해 자신 역시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알고 있는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가 안 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인 이유

 

오늘 독서는 그 길고도 긴 수산나와 두 노인 이야기입니다. 두 노인이 다니엘 앞에 서기까지는 두 노인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은 수산나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나타나니까 자신들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자신들이 수산나에게 덮어씌우려던 죄를 자신들이 다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두 노인에게는 다니엘이 원수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분을 만나지 못하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유명 피아니스트 블라디스와프 스필만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 스필만이 수많은 친구의 희생으로 살아남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이 되어 총 한 방이면 죽게 되지만, 독일군 장교는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는 그를 살려주고 음식과 옷까지 챙겨줍니다.

독일군에게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한 독일군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그리고 그가 준 독일군 장교의 코트를 입고 다니다가 폴란드군에게 죽임을 당할 뻔도 합니다. 독일군 장교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자기 가족과 친구를 죽인 독일을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간음한 여자에게 던질 돌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시며 당신 앞에서는 누구도 이웃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셨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은 가장 잔인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상이 드러나게 할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분 앞에서는 가능합니다. 자녀들이 부모 앞에서는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나의 은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통령이라 불리는 강형욱 조련사는 입질하는 개를 물에 빠트려버립니다. 물에 빠진 개는 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니면 자기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개나 사람에게 입질할 수 없습니다. 

개는 자기 생명의 은인 앞에서, 형제도 부모 앞에서, 그리고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을 하느님 자녀의 지위로 올려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하라고 하지 맙시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나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지위로 높여주셨음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요? 용서는 우리 앞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 죄가 용서받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래서 지옥에 가야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지위에 올려주신 분임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앞에서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어떤 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으로부터 사면장을 들고 사형 선고받아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풀려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형의 말에 동생은 먼저 판사를 죽이고 그다음엔 자신을 신고한 이를 찾아가 죽일 것이라 말합니다. 형은 동생을 사면할 수 없어서 나오며 사면장을 찢어버립니다. 내가 만나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능력으로 나를 세우셨는지 안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용서는 오직 인간의 지위에서 하느님의 지위로 높여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 주신 그리스도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도 나에 대한 권한을 지닌 분 앞이 아니면 자기 처지를 알지도 못하게 되고 그러면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미움을 덮을 수 있는 더 고마운 분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용서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제부터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사순 5주 월요일의 주제는 죄인을 살리시는 주님입니다. 그리고 살리시는 주님은 죽이려는 우리 인간과 비교됩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는 같은 죄인인 우리는 죄인을 죽이려 하는 데 비해 죄 없으신 주님은 우리 죄인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제부터’라는 주제로 나누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죄짓지 말라고 주님께서 하셨으니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은 죄짓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어떤 죄를 짓지 말아야 할지 생각해봄이 좋을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남을 단죄하지 말아야 하고 죽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자기를 반성하지 않는 죄인이 남을 단죄하기에 우리는 남을 단죄하지 않기 위해 먼저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그리고 반성과 단죄는 서로 반대되는 것임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단죄하면 죽이게 되는데 반성하면 회개하게 되고 같이 살게 한다는 점도 알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이제부터는 자기 죄를 감추거나 합리화하려고 남의 죄를 들추고 키우는 비열한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것에 비해 주님께서 살리려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죄 있는 사람이 오히려 죽이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바로 자기 죄를 감추거나 합리화하기 위함이지요. 나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쟤도 있다고 하는 것이요, 내 죄보다 쟤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이요, 내 죄가 아니라 쟤 죄로 시선과 화살을 돌리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죄짓지 않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아무리 죄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고, 죄짓지 않을 수 있더라도 고작 죄짓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죄짓지 않는 것으로는 사랑을 이룰 수 없고, 죄짓지 않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고, 사랑으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사랑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행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불쌍히 여겨야 할 불안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을 뿐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난 것이 없습니다. 인간 존엄을 위한 존중의 회개만 있을 뿐입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건만 우리만 우리 허물을 모를 뿐입니다. 하늘을 만날 참된 직면의 시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을 통해 맑고 깨끗하게 지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시듯 무거운 단죄의 돌을 치우듯 참된 감사로 돌아가야 할 사순의 시간입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랑과 용서의 길을 주님께서 먼저 가십니다. 말과 침묵 사이에 있어야 할 존엄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 속에서도 존중받아야 소중한 인격임을 강조하십니다. 

새로운 삶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죄의식과 죄책감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결코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참된 용기를 낳고 참된 존중은 참된 신뢰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단죄의 돌이 아닌 소중한 인격의 꽃밭에 용서와 존귀함의 꽃들을 심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죄가 아닌 소중함으로 바라보아야 할 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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