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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0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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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인간도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모든 이가 뽑힌 겨레, 임금의 사제단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바라고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백성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2023년 4월 1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라. (에제키엘서 37,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라. (에제키엘서 37,26)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제키엘서 37,21ㄴ-28)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오늘 복음
    (요한 11,45-56)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1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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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복음
요한 11장 45-56절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1일 (토)
이정훈 클레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8:4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1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13

📌 강론시작 19:0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1

📌 강론시작 08:5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1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23

📌 미사시작 1:03:49

📌 강론시작 1:10:5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우리는 지금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뒤(11,38-44 참조) 최고 의회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궁지에 몰리십니다. 죽은 이를 살리신 분께서 반대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위기에 놓이셨습니다. 수난 이야기의 역설적 전개는 라자로의 부활 사건과 오늘 복음이 연결됨으로써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곧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신 사건을 본 유다인들의 반응은 서로 다릅니다. 일부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다른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의심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바리사이들에게 보고합니다. 이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최고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흔드는 세력을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메시아의 기적을 행하는 인물이 대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두려워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대립 관계에 있는 로마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무능력한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지만, 복음서 저자는 그의 말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결과를 예고합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고, 동시에 널리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대사제 카야파의 말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오늘 복음 속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민족주의적 유익만을 계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는 지금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선한 사람은 타고난 것일까요

 

우리 주변에서 선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렇다면 이 선함은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환경에 의해서 선해진 것일까요? 선함은 타고난 것도 있고, 환경에 의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지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함도 재능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더군요. 선함이 재능이기에 갈고 닦아야 빛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능을 갈고닦지 않아서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선함도 갈고닦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지난달에 ‘박해 시대 신앙 선조의 사순시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처음 이 주제로 강의하는 것이었기에 오랫동안 책을 보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특별히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복자 김광옥(안드레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성격이 불같이 사나운 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게 되었지요.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하셨고 여러 가지 극기 행위를 실천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서 성격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책에서는 그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사나웠던 그가 젖먹이처럼 양순하게 되었다.’ 
 
엄격한 금식과 극기 행위는 분명 적지 않은 노력을 동반합니다. 육신의 편함을 끊고 주님 사랑에만 집중해야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선함이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 노력으로 자신의 선함이 빛나게 되는데,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걸어가 세상의 것만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선함은 빛을 잃고 악함만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선함도 재능이라고 했습니다. 이 재능을 썩히지 말고, 갈고 닦아 밝게 빛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선함을 통해 주님을 세상에 환히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요한 11,48)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군대를 풀어 폭력을 사용해서 곧바로 해산시키곤 했지요. 이 상황을 들면서, 많은 군중을 모으는 예수님을 가만 놔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인정하면서도, 로마의 군대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결국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의지를 내세워 주님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선함을 드러내면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낭비한 시간에 대한 후회는 더 큰 시간 낭비이다.

- 메이슨 쿨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 내에서도 거짓 신앙인이 생겨나는 이유

 

로랑 베그가 쓴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라는 책에 흥미로운 조사발표가 실려있습니다.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하지 않은 미국인 1,000명의 일반인에게 유명인 중 누가 천국에 갔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받은 사람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무려 79%가 마더 데레사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마이클 조던은 65%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표를 던졌습니다. 안타까운 사고로 죽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60%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도 79%인데, 자기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무려 87%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자신이 잘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렇게 생각했던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사제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사두가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사회에서 유력인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강력한 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은 당신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미 잘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왜 느닷없이 나타나셔서 당신을 믿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실까요? 그럼, 지금까지 자신들이 노력해 온 것은 무엇이 될까요?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잔인하게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핑계를 오늘 대사제는 이렇게 댑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나와 가족이 이 세상에서 죽는 것보다 그 사람이 비록 죄는 없을지라도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죄 없는 생명을 죽이게 하는 힘은 ‘세상 걱정’이었습니다. 이 말에 모든 사람이 당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뉩니다. 정글 아니면 동물원입니다. 영화 ‘보르히아: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은 15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 드라마로, 알렉산드로 6세 교황(Rodrigo Borgia)와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아들 체자레 보르지아의 야망과 교황직을 통한 권력 남용을 그린 작품입니다. 

보르지아 가문은 사실 이탈리아에 정착한 스페인 가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통일국가가 아니라 지방 군주들이 지배하던 이탈리아에서 그의 정치적인 생명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알렉산드로 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자기 아들 세 명과 딸을 통해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축출해갑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 셋의 목숨을 잃게 되고 딸은 여기저기 이용당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했던 알렉산드로 교황도 독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어떻게 교황까지 되었으면서 교회 내에서 이렇게 일가족이 온통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교회가 제 역할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글과 같은 세상을 동물원처럼 믿게 하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교회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도 오늘 대사제처럼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사제는 동물원이 아니라 정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선전용으로 삼았지 진짜 신앙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세상은 동물원이 아니라 정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성적 제일주의로 키우려 했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사자와 호랑이가 있는 곳에 아이를 끌고 갑니다. 그리고 사자 앞에 아이를 앉히고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을까요? 많습니다. 동물원에 가면 그런 아버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유리가 있어서 맹수로부터 아이가 안전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잘도 따릅니다. 아버지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걱정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지도자들의 말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종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 세상이 정글이 아니라 동물원임을 믿게 하는 가장 완전한 훈련법은 ‘십일조’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를 통해 한 번 맹수 앞에 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면 주님을 더 믿게 되고 그러면 착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따르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주는 대상을 따르게 됩니다. 만약 유다인들이 십일조가 제대로 된 마음으로 봉헌했다면 그들의 선동에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점점 동물원으로 여기며 살 것인지, 정글로 여기며 살 것인지는 지금 내가 어떤 모험의 길로 들어서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봉헌으로 주님을 더 믿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기고 살아남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누가 결국 구원의 보증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는 명확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며 이 세상을 동물원처럼 살아가려고 자신을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훈련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받아들여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존재임을 믿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에덴동산이 선악과가 바쳐지지 않으면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불감증과 사랑 이기주의 때문에

 

주님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그 죽음은 하느님 자녀들을 모으고 하나로 만들기 위한 거라고 오늘 전례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나 이제 떠나가 살던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실은 죽음이 하나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개죽음은 절대로 하나로 모을 수 없습니다. 

개죽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아무런 의미 없이 죽은 죽음이지요. 죽었는데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죽었는데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이고, 죽었는데 아무 일 없었던 듯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하다면. 

그러므로 사랑하기에 죽고 그 죽음이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남아야,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죽음이 흩어진 하느님 자녀를 하나로 모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 죽음이 개죽음이 아니고 사랑의 죽음이고 사랑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인데 정말 주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남아 모두를 하나로 모을까요? 

주님의 죽음이 모두를 위한 사랑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남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당장 주님을 죽이려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자기 민족을 무너뜨릴 자라고 생각하기에 죽게 하지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새로운 미사 경본의 성변화 부분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곧 이전 경본에서는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고 했었는데 새 경본에서는 “모든 이”를 “많은 이”로 바꿨지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모든 이가 아니고 많은 이라면 주님 사랑에 예외가 있다는 말인가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이 말은 이런 뜻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사하고 하느님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돌아가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처럼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도 어쩔 수 없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하나로 모으신 것이 아니며 한 마디로 실패지요. 

여기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나는 받아들이는가?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희생이요 사랑이라고 느끼는가? 

느끼지 못한다면 나의 사랑 불감증으로 인해, 나는 주님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이고,.모든 이를 위한 죽음이 아니게 만드는 것일 겁니다. 

저로 말하면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사랑으로 돌아가신 것은 분명한데,모든 이를 위한 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그 사랑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함입니다. 사랑 불감증도 어느 정도 있고, 사랑 이기주의도 있음을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뚜렷한 봄꽃의 울림이 환하게 퍼지는 4월의 첫날입니다. 아낌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상식이 흔들리는 일을 너무 쉽게 자행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조차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 어리석은 우리의 폐쇄성을 아프게 만납니다. 우리모두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진지하게 성찰합니다. 

집단적 무력감에서 벗어나 잘못된 우리의 마음부터 먼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종교는 사람을 불행에 빠뜨려서는 안됩니다. 궁극의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이 종교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는 양심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평화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그만큼 자기 발견과 자기 계발이 필요한 정신적 자유의 영역입니다. 

정신적 자기 수련이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으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십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실천하십니다. 여렷을 위해 홀로를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도 된다는 엄청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사순시기가 하느님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먼저 부끄러움을 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은 내가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려는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습니다. 희생자를 만드는 종교가 아니라 희생자를 만들지 않는 건강한 종교 건전한 신앙이길 기도드립니다. 결핍과 고립이 아닌 변화와 수용이라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십자가임을 다시 깨닫는 봄날 새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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