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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02 (일) 성지주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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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소리,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2023년 4월 2일 (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2일
성지주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태 21,9)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마태 21,9)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0,4-7)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제2독서
    (필리피서 2,6-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 26,14─27.6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2일 (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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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마태 복음
27장 11-5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그때에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총독이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2.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

14.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18.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20.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23.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4.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25.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27.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28.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29.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30.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33.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34.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37.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39.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40.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42.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43.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그분께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2일 (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종강 시몬 주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53

📌 강론시작 14:5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2일 (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15

📌 강론시작 21:4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일 (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3

📌 강론시작 10:4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예수님의 부르짖음

 

늘 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올해는 전례력으로 가해이므로, 마태오가 전하는 수난기가 미사 전례에서 선포됩니다. 오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죽음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 22(21)편 2절을 인용하시며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이 부르짖음은 신체적 고통에서가 아닌, 영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에서 나오는 호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육체적 고통은 참을 수 있으셨지만 하느님에게서 버림받는 것은 두려우셨습니다. 그래서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셨지만(26,39 참조),   아들의 ‘버림받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주실 때, 비로소 많은 이를 구원하는 사명을 완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끊어 버리지는 못합니다. “저의 하느님”이라는 부름은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 하느님 구원 계획의 ‘역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버림을 받으셨지만, 이로써 많은 이가 생명의 양식을 받았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증명한 역설의 진리를 삶 가운데 실천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무관심은 더 커진다.

 

지난달, 서울로 강의 갔을 때 깜짝 놀랄만한 체험을 했습니다. 전철을 탔는데 마침 빈자리가 있어서 얼른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편하게 가겠구나. 오늘 정말로 운이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읽으려고 넣어둔 책을 꺼내 읽고 있었지요. 한참을 읽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이 자리에는 아주 젊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앉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보게 된 분은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였습니다. 피곤해서 잠시 졸았던 것이 아닙니다. 책이 재미있어서 계속 깨어있었고, 또 혹시라도 내려야 할 지나칠까 봐 계속 전철역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옆자리의 사람이 바뀐 것을 몰랐습니다. 혹시 이 자매님이 변신한 것일까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책에 신경 쓰고, 전철역 확인에만 신경 쓰다 보니 불과 몇 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의 변화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그 무관심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우리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성당에 가서 미사 참석하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있는 사람이 과연 늘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 것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옆에 계신 주님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주님이십니다. 그렇기에 계속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교회는 ‘성주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교회의 전례 주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이 주간의 시작인 오늘, 우리는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합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렬히 환호합니다. 그러나 이 반응이 계속되었을까요? 불과 며칠 뒤, 사람들의 반응은 180도 바뀌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자가 아닌 없애야 할 흉악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과연 집중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 안에서만 제대로 주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의 마음은 낙하산과 같다. 펴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 오스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진정으로 “호산나!”라고 외치는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울 때 ‘나를 위해 사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누군가를 찾게 됩니다. 그분이 구원자이시고 그분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만약 아직도 ‘나’로 살아가는 것이 견딜만하다면 어떻게 호산나가 나올 수 있을까요? 

영화 ‘마더’(2009)에서는 장애를 지니고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그 어머니는 아이에게 농약이 든 박카스를 마시게 해서 아이가 그렇게 된 데 대한 매우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배운 침술로 돈을 벌고 아들을 위해 씁니다.

어머니는 감옥에 갇힌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 아들의 유일한 친구도 의심하고 여러 사람에게 좋지 못한 일을 행합니다. 마치 침을 꽂으면 아픈 것처럼 타인을 아프게 하는 모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아들이 살인을 저지른 범인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사실 아들을 위해 산다는 핑계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때의 죄책감을 갚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방식입니다.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습니다. ‘자아’(ego)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의 뱀이 하와를 자기를 위해 살게 만든 것처럼 자아는 자녀 사랑까지도 이기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둡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그 죄책감을 없애줄 분뿐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시듯 그분만이 우리를 자아의 무덤에서 불러내실 수 있으십니다. 한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새총으로 놀다가 할머니 오리 한 마리를 죽게 했습니다. 아이는 오리를 장작 깊숙한 곳에 숨겼습니다. 

저녁에 할머니가 그 아이의 여동생보고 설거지를 함께 하자고 합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가 할 것이라 말합니다. 오빠가 자신이 왜 해야 하느냐며 따집니다. 이때 동생은 오빠의 귀에 대고 “오리를 기억해!”라고 속삭입니다. 동생이 봤던 것입니다. 여동생은 며칠 동안 모든 심부름을 “오리를 기억해!”라는 말로 오빠에게 시킵니다. 

오빠는 이제 자유롭지 못하고 여동생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할머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합니다. “지금 나를 구하소서. 호산나!” 할머니는 “나도 다 알고 있었어. 네가 언제까지 동생에게 노예 생활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여동생이 아닌 자신을 용서해 준 할머니를 위해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여동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죄를 없다고 하시려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면 됩니다. 아버지를 위해 살면 됩니다. 

하지만 오리를 죽인 값에 대한 피해는 할머니가 지는 것처럼, 우리 죄에 대한 피해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지십니다. 우리가 그 값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면 결국 죄를 용서받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녀들이 부모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자신도 부모와 같은 인간임을 믿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야 얻게 됩니다.

한 부자가 죽을병이 들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들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손으로 한 달 동안 일해서 돈을 벌어오면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친구들에게 돈을 꾸어 한 달 뒤에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하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롯불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벌어오라고 합니다. 아들은 이번에도 빌린 돈을 가져다드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또 그것을 불에 던집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아들은 안 되겠다 싶어 정말 고생고생하며 돈을 법니다. 처음 일을 해 본 것이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난롯불에 던졌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이건 제 피와 같은 돈이에요!”라며 난로에 손을 집어넣고 불타고 있는 돈을 꺼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손에 화상까지 입습니다. 이것을 보고서야 아버지는 “이제 유산을 물려주어도 되겠다!”라고 하며 아들을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은 그만큼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물려주시는 아버지를 위해 살기로 결심합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 “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나 자신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우리를 해방하러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값을 묵상해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고마운 사람을 위해 삽니다. 그래서 그분께 대한 감사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나아감이 참다운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성체의 모양으로 우리 안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께 겉옷을 벗어 깔 수 있는 감사의 마음으로 성취됩니다. 매일 미사가 진정한 구원의 예루살렘 입성이 되게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대와 각오

 

어제 복음에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자 주님께서는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에프라임으로 피신하시는데 파스카 축제일이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겠냐고 기대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어제 복음은 끝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들의 기대대로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가 그들의 기대와 같은 것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들의 기대는 이스라엘 다윗왕의 자손인 임금의 입성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것은 헛된 기대이고 그 기대는 허망하게도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실은 기대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그들과 같습니다. 각오는 잘하지 않고 기대를 많이 하는 우리지요. 

그런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행복하려면 기대는 조금 하고 각오를 많이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니, 기대는 아예 하지 말고 각오는 최대한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기대가 깨지거나 무너진 적이 한두 번입니까? 오래 살았으면 살았을수록 우리 인생은 반反 기대의 인생이었잖습니까? 

그래서 악을 각오하면 행복할 것을, 선을 기대하여 불행해지지 않았습니까? 최악을 각오하면 언제나 행복할 것을, 그렇게 매번 배반당하면서도 또 기대하고 계속 기대하여 아직도 불행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기대는 죽어야 그만두게 되는가 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기대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나를 사랑하지 않는 한 계속 이럴 겁니다. 

사랑에는 등급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그리고 자식에게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꽃길만 걸을 수 있겠습니까? 꽃길만 걸을 수 있더라도 그 길만 바라는 것은 낮은 등급의 사랑입니다. 

최고의 사랑이요 참사랑은 가시밭길을 걸어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이고 가는 길에 돌을 만나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삼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꽃길을 걷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것을 보면 꽃길은 나를 참 행복으로 인도하는 참사랑의 길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십자가 길을 가려는 곧 수난을 감수하려는 사랑이 참사랑과 참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면 고통이 달다는 말은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고통이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받는 고통은 받아도 행복하기에 달다는 말이고, 사랑 없이 고통을 받으면 고통이 불행하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참사랑을 일컬어 라틴말로 Passio, 영어로는 Passion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은 Passio Christi 또는 Passion of Christ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는 참사랑을 하면,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참사랑을 하면, 자기만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고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참사랑을 많이 묵상하고 본받으려는 오늘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가 위의 주님께서 받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똑같이 느끼고, 그 고통을 감수케 한 주님 사랑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처럼 기도하는 사람도 되어야겠습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내 마음을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빼내어 차지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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