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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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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대로 제 발걸음을 굳건히 하시고, 어떠한 불의도 저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이 사순 시기에 절제와 선행을 실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언제나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2023년 3월 15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4,1.5-9)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 오늘 복음
    (마태오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1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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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마태오 5장 17-19절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15일 (수)
최광호 바실리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15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15

📌 강론시작 16:1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5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6

📌 강론시작 06:4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5일 (수)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40

📌 미사시작 1:02:04

📌 강론시작 1:09:4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말씀을 채운다는 것

 

신약 성경에서 ‘완성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몇몇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현된 것은 ‘가득 채우다’는 의미에서 완성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우러 왔다.’ 말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율법이나 예언서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으로 표현된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법’입니다. 법은 성경에서 ‘율법서’라고도 부르는 모세 오경을 가리킬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모세 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완성하러 오신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들’이고 이는 구약 성경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채우러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율법이 아닌 성경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채우는 것은 그 의미를 새겨 하느님의 뜻에 맞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자주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모든 활동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안에서 그리고 활동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이루신 분이시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법을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하느님 말씀은 여전히 우리가 저마다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기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역사 안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일까요? 타고난 능력이 그들을 거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Sistina Chapel)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노력했고, 비로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인의 능력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현존을 지금 삶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또 그 뜻을 실천해나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사랑을 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주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할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사랑 실천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장 작은 계명’은 어떤 계명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작은 계명조차 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은 계명일까요? 우선 큰 계명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조금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열 개로 나눈 십계명이고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더 세세하게 나눈 613개의 계명이며 더 작은 계명은 관습법이나 전통입니다. 그러니 아주 세세한 사랑의 계명까지 다 지키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키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안식일 법을 만들어놓고 철저히 주님을 생각하며 쉽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도 철저합니다. 그들만큼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킨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시기는커녕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과속하지 않고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JTBC ‘신성한 이혼’에 나오는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변호사 신성한은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란 모토를 걸고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입니다. 이때 유명한 라디오 DJ 이서진이 자녀의 양육권을 자신이 갖게 해 달라며 이혼소송을 청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도하여 그 동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유포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처음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해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지독한 의처증 환자였습니다. 전화를 30분마다 해서 누구와 있느냐고 보고하게 하였고 속옷까지 사진을 다 찍어두었으며 스티커를 하루에도 수십 장씩 써서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바람피운 엄마와 살겠다는 아들에게 엄마의 동영상을 보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서진 씨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파렴치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정에 충실하다고 여겼던, 그리고 겉으로는 그랬을지 모르는 남편이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화를 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음탕한 욕망을 지니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나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행동으로 사랑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인 줄 압니다. 행위가 크고 생각이나 마음은 작은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계명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에서부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다음이 생각으로 짓는 죄이고 그다음이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위에 집중할 때 우리는 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까지도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높게 봅니다. 믿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요?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가르침을 받아 내가 부모처럼 인간이라 믿고 부모를 닮으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나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고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하며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어기지 않도록 사는 방식이고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큰 사랑 작은 사랑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 민족이 있냐고 자기들이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민족이 있냐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이것이 주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만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그러실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는 족속이 있고,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족속이 있을 뿐이고 뿐이겠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느님 현존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신앙인이란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지요. 

저도 나이 먹어갈수록 더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니 체험이라기보다는 늘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하느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또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제게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손님처럼 와 옆에 계신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전에는 내가 다른 데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어디 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느낌 그것도 늘 머무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늘 물속에서 살듯이 저도 하느님이라는 바다 또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바다에서 뭔 짓을 하든 하면서 살아가는데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도 딴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엔 딴짓할 때는 하느님께서 감시하신다는 느낌 또는 하느님께 들켰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고 당연히 이때의 하느님은 두려움의 하느님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래서 탈입니다. 

아무리 딴짓해도 하느님 사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인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있고 하느님이 편한데 그것이 문젭니다. 

아직도 사랑 미성숙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며 온갖 혜택을 누리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며 받기만 하고 드릴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받는 것도 잘하지만, 드릴 줄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는데 큰 것은 물론 작은 것도 다 실천하려고 합니다. 사실 큰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작은 것까지 빠트리지 않고 실천하고, 작은 사랑은 다 실천할 수 없기에 생각나는 큰 것 한두 가지만 실천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사랑이 작은 자식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 한두 가지만 알고, 알더라도 그 좋아하는 것을 벼르고 별러서 해드리지만 사랑이 크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그것을 별러서 하지 않고 당연한 듯 일상으로 해주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란 사랑이 작은 자를 말함이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언제나 바른 길을 일깨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의 길입니다. 하느님 앞에 온전한 마음이 바로 계명이 지닌 선(善)한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을 잘 유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래 정신입니다. 악을 멈추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 계명을 적극적으로 완성하는 삶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리는 실행을 통해서만 우리와 가까워집니다. 

스스로 밝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끝까지 잘 지니고 충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은 올바른 생활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길은 어느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할 때 이루어지는 완성의 길입니다. 생활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얽매임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길을 따르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참기쁨입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주고 받는 삶에서 중심이 되고 질서가 되는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를 원만한 인격으로 이끕니다. 올바른 인격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쳐야 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생활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계명의 치열한 실행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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