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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1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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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저희가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저희의 삶을 이끌어 주소서.

 

2023년 3월 11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미카서 7,14-15.18-20)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11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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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복음
루카 15장 1-3절, 11ㄴ-32절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11일 (토)
박용준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11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54

📌 강론시작 17:56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1일 (토)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5

📌 강론시작 07:0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1일 (토)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42

📌 미사시작 1:03:42

📌 강론시작 1:10: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비유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작은아들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죄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뉘우침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는 아버지의 심정 표현은 온전히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복음서에서 ‘가엾은 마음’은 동정이 아니라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비교적 적게 관심을 받지만, 큰아들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집안의 일을 도맡아 성실하게 “종처럼”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충실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귀환과 그를 위한 잔치가 마뜩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두 아들을 대비하여 보여 줍니다. 작은아들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비의 체험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행복이기보다 견뎌야 할 일입니다. 

작은아들은 스스로 품팔이꾼이라고 하지만 아들로 대우받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 종인 듯 살아 갑니다. 오늘 비유는 교회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은아들은 회개하는 죄인을, 큰아들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말합니다. 나는 어떤 아들의 모습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에비앙 생수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매끈한 피부. 에비앙 천연 광천수를 하루에 1리터씩 추가로 마신 사람 가운데 79%는 피부가 눈부시게 부드럽고 촉촉해져 결과적으로 더 젊어 보이는 효과를 경험했다고 보고합니다.” 
 
이 문구를 보고 나서 에비앙 생수와 우리나라 생수 중에서 무엇을 손에 쥘까요?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왕이면 피부가 좋아진다는 에비앙 생수를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른 생수라도 하루에 1리터씩 마시면 에비앙 광고와 똑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은 에비앙 광고를 보고서는 이런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살 때가 많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하나의 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정말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상대의 방식을 “틀렸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기도방식이 있습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영화를 보면 쉽게 잠듭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영화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습니다. 눈으로 그리고 귀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지면 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신나게 찬양하는 성령 기도는 조금 힘듭니다. 그렇다고 성령 기도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기도회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조건 갑니다. 
 
다양한 길이 항상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를 이해하는 길이 생기게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른 길을 갈 뿐인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길에도 주님께서는 함께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착한 아들은 누구일까요? 분명히 큰아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한 아들만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아들이 왔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상관없이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관점에서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원망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금부터라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그만큼 당신의 잠재력이 개발될 것이다.

- 데일 카네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꿈을 결정해줘도 될까?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23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73회, 더블스 23회 우승을 하였고,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7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49회, 더블스 14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세계 랭킹 1위와 2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세레나 윌리엄스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위대한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가 리차드 윌리엄스입니다. 리처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만들 꿈을 가졌습니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되는 걸까요? 심한 인종차별을 겪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던 리처드는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두 딸을 믿고 둘 다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습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막힌 흑인들에게 자신의 딸들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역 인종차별자라 볼 수 없습니다. 두 자매가 승리를 거듭하며 자신들이 이긴 백인 선수들을 조롱하자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을 강조하고 두 자매가 경쟁하되 서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두 자매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테니스를 시킨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모든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꿈을 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인생을 선택하여 살았다면 지금처럼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보이는 존경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처럼 힘들게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면 더 나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테니스라고 정한 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세 자매를 모두 위대한 체스 그랜드마스터로 키운 아버지 라슬로 폴가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들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꿈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싶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대로 큰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믿워줘야 합니다. 그것이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쨌거나 자녀를 인도해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올바르게 클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가 잘못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고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잘못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보다는 표지판 없는 도로가 낫지만, 표지판 없는 도로보다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가 낫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종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자녀가 커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은 어쨌거나 자녀의 표지판입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대상은 이 비유에 나오는 형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모라면 자녀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살 수밖에 없고 삶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들도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정해주시는 분이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버지처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의 삶의 방향까지 정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잇점이 있기에 빨리 정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국 남자 스노보드 이채운(17·군포 수리고) 학생이 한국 설상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아버지는 어떨까요? 모두 자신보다 자녀가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빨리 캐치하여 자녀를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이 잘못된 것보다는 표지판이 있는 것이 낫고 – 이것은 자녀를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또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시켜 경쟁시키기 보다는 더 명확한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오늘 복음은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의 얘기입니다. 이 복음을 오늘 저는 몇 가지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한 점입니다. 작은아들이 꼭 자기 몫을 챙겼어야 했나 하는 점입니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까지 베푼 것에  화를 내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지요.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이런 아버지의 생각처럼 작은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다 아버지의 것이 되면 좋을 텐데 왜 굳이 자기 재산을 따로 챙기는 것일까요?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둘째로, 작은아들이 먼 고장으로 떠난 점입니다.요즘 자식들이 시집 장가 가도 부모 곁에 집을 마련하여 왕래하고 또 아이들 돌봄도 받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 분가하더라도 옆집으로 분가하거나 멀리 가더라도 가까운 도시로 갈 수 있었는데 왜 굳이 그리 멀리 멀리 간 것일까요? 아예 관계를 끊고 상관을 않고 살겠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관계를 끊으려고 한 것일까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라고 큰아들에게 한 말처럼 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버지와 그러니까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았던 걸까요? 왜 굳이 그리 멀리 간 걸까요? 

내 맘대로 하고 싶어서? 아버지 간섭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싶어서? 

아마 그랬을 겁니다. 자기 몫 챙긴 것,  먼 고장으로 떠난 것, 둘 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내 맘대로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것인데 결과는 아버지의 자비를 떠난 것입니다. 

작은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자비가 간섭이었고, 맘대로 할 자유의 침범 또는 제한일 뿐이었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자유와 사랑이 충돌합니다. 자유 때문에 사랑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자유롭기 위해서 관계를 거부하고 자비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 사순 시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관계보다 고립을, 사랑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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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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