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저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3월 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예레미야서 17,5-10)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오늘 복음
(루카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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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복음
루카 16장 19-31절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9일 (목)
이영준 모이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3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9일 (목)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5
📌 강론시작 15:5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9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6
📌 강론시작 06:44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9일 (목)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21
📌 미사시작 1:06:43
📌 강론시작 1:12:55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부자와 라자로
복음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 전부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서가 언급하는 이름은 그 이름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는 흔히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로 불립니다. 라자로는 엘아자르의 축약형으로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지닙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라자로와 ‘어떤 부자’입니다. 비유에서 아브라함과 어떤 부자가 직접 대화하지만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라자로만이 언급됩니다. 이미 ‘라자로’라는 이름에서부터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드러납니다.
비유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부자와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라자로에 대한 묘사는 현세에서 드러나는 부와 가난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은 다릅니다. 라자로는 복된 모습이지만 부자는 고통을 겪는 듯합니다. 비유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현세의 상황과 반대로 된다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자로는 오직 이 한 가지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라자로로 대표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처럼 보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바른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때가 좋았어.
지난 2월에 갑곶성지 영성센터로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피정 중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생활했던 공간, 그러나 이제는 전담 신부가 아닌 피정자로 이곳에 오니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성지를 돌아다니며 옛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갑곶성지를 처음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려졌습니다.
성당이 없어서 야외에서 비 맞으며 미사를 했던 기억, 자전거 타다가 사고 나서 팔목 뼈 골절로 힘들게 지냈던 기억, 여름이면 땀을 흘리며 야외에서 일했던 기억, 성지를 꾸미기 위한 노력 등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순례객이 늘어났고 그만큼 기쁨의 크기도 컸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하소연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신부들을 만나면 그 신부들은 저의 하소연을 계속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시간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떠올리며, 과거가 현재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데도 지금 내 머릿속에 가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가 있기에, 지금 이 순간에 큰 기대를 하게 됩니다. 지금 산적한 많은 문제, 그러나 이 문제들도 별것 아닌 일이 될 것임을, 그래서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나쁜 시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나쁜 시간이라고 스스로 이름 지으며 확정 지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섣부른 확정이 지금을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으로 만듭니다. 현재도 멀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미래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고, 라자로는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죽음 뒤에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을 누리고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았다면 부자는 라자로를 비참하게 놔둬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사랑을 베풀어야 했습니다. 이 부자가 자기의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 경고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과 자기와 연관된 사람을 향하고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이렇게 뒤바뀔 수 있음을 보면서, 지금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비참한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그래서 그 순간에도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미래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 마하트마 간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사람을 알아가는 4단계
영화 ‘빅 피쉬’(2003)는 아버지의 인생을 그의 아들이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들 윌리엄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매우 흥미진진한 아버지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허황된 전설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으며, 성장하여 기자가 된 아들에겐 거의 헛소리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들은 성장할 때 아버지가 거의 함께해주지 못했으며 집에 가끔 올 때마다 그런 허황된 이야기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와 3년째 대화를 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암이 걸려 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임신한 애인을 데리고 아버지에게 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큰 물고기에게 반지를 빼앗겨 그것을 잡느라고 엄마와 결혼식도 못하고 아들이 태어날 때도 함께 해 주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지만, 기자답게 차근차근 아버지의 기록들을 훑어봅니다. 그랬더니 분명 진실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들에 진심이 담겨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했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실에 기반하여 1%의 이야기로 각색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시느라 어머니와 결혼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 외판원으로 전국을 떠돌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미안함을 이야기를 만들어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에 작가답게 맺어줍니다. 바로 자신이 아버지가 만났던 동화속 모든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아버지를 강물에 담가주니 아버지가 커다란 물고기가 되어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이야기에 동참해주는 아들에게 흡족해합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습니다. 아들은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상상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다 허황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떤 것들은 진실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진심이 담겨있습니다. 교회 전통적인 성경을 읽는 법은 ‘읽기(Lectio)-묵상하기(Meditatio)-기도하기(Oratio)-관상하기(Contemplatio)’의 4단계입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말씀은 읽기입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아버지의 삶을 조사하며 그 이야기들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내는 과정이 묵상입니다. 그런다음 아버지의 이야기를 완성시켜가는 단계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거의 ‘봉헌’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것에 내가 가진 것을 보태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미사로 치면 성경을 읽는 것이 읽기이고 강론을 듣는 것이 묵상이며 봉헌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관상을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한 것처럼 나도 자녀에게 하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알아가든, 하느님을 알아가든 이 네 단계를 거스르거나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대표하는 부자는 묵상과 기도의 단계는 뛰어넘고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곧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분명 우리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표징을 이해할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무서워서 물건을 부활한 라자로에게 집어던지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 부활의 상징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나도 무언가 보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봉헌으로 이어져야 하고 봉헌 없는 성체는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말씀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슴 뜨겁게 해석해 준 것에 고마워 음식을 대접해드리기 위해 자신들의 집에 초대했을 때 그들은 부활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루카 24,13-35 참조). 엠마오의 제자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이미 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상을 시켜 봉헌하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께 봉헌드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을 좀처럼 믿기 어렵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것을 그분이 받는 것을 보아야만 그분이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감사해야 나옵니다.
감사하려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일 미사 때 거의 봉헌을 하지 않습니다. 봉헌하지 않으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시 성체 안에서 표징을 발견하고 믿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여 감사한 봉헌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복음의 부자처럼 될 것입니다. 미사 때 봉헌의 의미를 다시 되살리는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체는 끝가지 의미 없는 형식에 머물게 됩니다. 말씀을 다시 살려냅시다. 그 증거는 빅피쉬의 이야기를 끝낸 아들처럼 감사의 봉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천국에는 이름이 없는.
오늘 복음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 무조건 갈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진복 팔단의 가르침대로 살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끝부분을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말하지요. 자기처럼 자기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하는데 죽은 라자로가 가야 회개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이 회개할 죄는 아니지요. 회개는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지 행복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지요. 회개해야 할 죄는 이 세상 행복 때문에,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도 갈망하지도 않은 이유는 오늘 예레미야의 말처럼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의지하고 자기 힘과 돈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지옥에 있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물 한 방울을 갈망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은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았고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만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회개해야 할 행복이고 죄스러운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해야 할 그의 죄라면 다음으로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라자로와의 관계입니다.
갈망하지 않은 죄가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단절의 죄라면 사랑하지 않은 죄는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단절의 죄입니다.
복음의 부자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부자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모두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살 때는 라자로와는 전혀 아는체하지 않았고 그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완전한 단절의 삶을 살았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봤지만 보고도 못 본 체했을 것입니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본 체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마음 밖으로 라자로를 밀어냈을 겁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 있을 때는 너무도 뻔뻔스럽게 라자로를 끌어들입니다. 그를 시켜 물 한 방울이라도 축이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애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의 고통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눈이 여전히 사랑치 않은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자기 고통만 보고 봅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의도적으로 라자로에겐 이름을 붙여주고 부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고 그저 부자라고만 합니다.
천국 명부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는 뜻일 텐데 나 김찬선이는 천국 명부에 이름이 있을 건가?!
나 김찬선은 오늘 복음의 그 부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래서 그는 이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 많은 고초를 겪은 라자로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라자로를 먼저 위로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마주할 것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람의 죽음은 낮과 밤처럼 늘 우리곁에 붙어있습니다. 모든 죽음은 우리가 마침내 돌아가야 할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멈추어야 할 우리의 욕심입니다. 묶인 것을 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모든 죄는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을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의 고초를 위로하시는 십자가의 하느님이십니다. 아픈 십자가가 오늘의 더 아픈 십자가를 위로하십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이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쪽과 저쪽도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시작은 더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모순과 욕심의 이중성을 깨뜨리는 예외없는 죽음의 여정입니다. 빛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참으로 참으로 내려놓는 새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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