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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0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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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가족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선행을 하고 마침내 천상 선물을 풍성히 받게 하소서.

 

2023년 3월 8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예레미야서 18,18-20)
    어서 그를 치자.

  • 오늘 복음
    (마태오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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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복음
마태오 20장 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8일 (수)
박용준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2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8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13

📌 강론시작 15:4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8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9

📌 강론시작 06:55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8일 (수)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3:26

📌 미사시작 1:03:21

📌 강론시작 1:11:3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 뒤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과 함께 활동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신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대한 증인이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이어 갑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우리 안에서 지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탄생하게 될 교회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복음서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활동을 전하면서 제자들의 모습도 전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이 그리 훌륭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셨던 네 명의 제자에 속하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4,21 참조).

야고보와 요한의 일화는 당시 예수님에 대한 일부의 견해를 소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임금과 관련된 낱말이었고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백성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통치자의 구실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치적인 메시아상과 거리가 멉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에게서 본보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아니셨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외아드님이시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똥멍청이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또라이다.

 

어린이들에게 춤을 춰 보라고 하면, 한때 ‘개다리 춤’만 췄었습니다. 다리를 흔들면서 박수치며 손을 번갈아 머리로 넘기는 춤입니다. 코미디언 배삼룡씨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춤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아이들에는 인기 있는 춤입니다. 한번은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이 춤을 따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박장대소합니다. 겨우 이런 춤을 추냐는 비웃음도 보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동창 신부가 “이 춤 진짜 어려워. 너도 한 번 춰봐.”라고 말합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의 뻣뻣한 몸으로는 도저히 출 수 없는 어려운 춤임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BTS의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 뒤, 그 중 딱 6초 동안의 안무를 보고서 춰 보라고 했습니다. 딱 6초입니다. 전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춤을 제대로 추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레짐작으로 ‘나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운전 실력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자기 운전 실력을 스스로 점수 매겼습니다. 사람들 모두의 평균 점수는 몇 점이었을까요? 80점? 85점? 아니었습니다. 자그마치 93점이었습니다. 모두가 90점 이상의 베스트 드라이버인데 왜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을까요?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똥멍청이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또라이다.” 
 
자신은 잘한다는 착각. 이 착각으로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단죄했을까요? 훨씬 부족함이 많은 나인데도 말이지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면서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부모님의 마음으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소망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자기 아들이 다른 제자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고, 그 당연한 생각을 예수님께서 인정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들 역시 스승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시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달리, 나를 낮출수록 높아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 자기는 잘하고 남은 못한다는 교만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이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 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비굴과 겸손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자신을 낮추어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 더 겸손한지 내기하듯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겸손과 비굴함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은 높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고 비굴함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바다의 물은 어떤 나무에도 도움이 안 되지만 위에서 내리는 비는 나무에 생명을 줍니다. 이처럼 높이 있다가 낮아질 때 누군가에게 자존감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역의 제과점에서 물건을 배달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청년 시절엔 과도한 관료주의와 잘못된 정치에 대해 저항하는 삶을 삽니다. 총을 여섯 차례 맞았고 무려 13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2009년 정당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는 법에 따라 재임을 스스로 거부하고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받아 퇴임할 때가 더 높은 지지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우루과이 남서부에 거주하는 헤랄드 아스코타라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내용인데, 그는 도로위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지갑까지 잃어버려 택시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쳤지만 잠시 뒤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정차했습니다. 

운전자는 그에게 대통령궁까지만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탑승이 중요했던 아스코타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는데 어딘지 낯익은 사람이 운전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운전자와 동승자는 다름아닌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영부인이었고 운전자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그는 사진을 찍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자신의 SNS에 올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호세 무히카가 대통령궁이 아닌 자기 사저인 농가에서 생활하며 운전기사 없이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궁은 국민의 재산이라며 날시가 추워져 지내기 힘들어진 노숙자를 위해 피어있는 대통령궁을 내어주기도 했고 재임기간의 급여 90%를 빈민 주택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중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계층을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먼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먼저 성체를 영하고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때 그 사람도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이 믿음 없이 하는 겸손은 그저 상대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비굴함에 불과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대해줍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겸손함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꽃길만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며 그곳에서 수난과 죽임을 당하실 거라고 세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빛나는 영광의 타볼산에서 내려오시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하시는 말씀인데 이 길이 가시밭길이요 십자가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는 이 길이 꽃길이라 생각하고 미리 ‘자리 청원’을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아무리 수난을 예고하셔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만 하십니다. 

듣고 싶은 말만 하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너는 꽃길만 걸을 거야!’라고. 그리고 엄마의 자리 청원에 대해선 ‘당신 아들은 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주님은 듣기 좋은 말을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길을 가야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어미보다 아들들을 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까? 

저는 음악방송을 늘 틀어놓고 일하는데 음악을 신청하면서 취직하는 사회 초년병 자식 사연을 전하면서 자기 자녀들이 꽃길만 걷기를 바란다는 엄마의 마음을 전하지요. 

이런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 사도 엄마의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어미의 마음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그래서 신앙인인 우리는 이 지점에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꽃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가라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 어미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고 믿는지 도전을 받습니다. 

사실 신앙인인 우리가 주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고,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고, 특히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거나 주실 때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프란치스코처럼 백 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 청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지은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주 하느님, 나의 이 모든 고통에 대하여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나의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백 배의 고통을 더해 주시기를 비나이다.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행함이 나에게는 넘치는 위안이 되기에, 나를 가차 없이 고통으로 괴롭히시는 것을 진정 기쁘게 받아들이겠나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주신 고통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고, 고통을 더 주십사고 우리가 청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주시고, 우리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순전히 천국 여정을 위해서고, 그래서 그것이 꽃길보다 더 큰 사랑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고난에서 구출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더 큰 사랑입니다.,이 세상 사는 동안의 행복을 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꽃길만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 기도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반드시 간직해야 할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섬기려는 정신입니다. 서로 이기려고만 하는 자리는 평화와 존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소중한 공동체를 통해 서로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의 자리를 강조하십니다. 존경과 존중이 공동체의 참된 화합과 참된 치유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수용과 포용 없이는 섬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을 울리시는 예수님의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입장을 먼저 배려하십니다. 섬기는 삶 섬기려는 끝없는 마음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소통과 상호존중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마음 조종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섬기는 마음 꼴찌의 참된 마음입니다. 

삶의 올바른 자세는 목적과 수단이 섬기는 정신을 통하여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섬기는 빛이 세상을 환히 밝히는 참된 빛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꼴찌도 사람으로 지키고 간직해야 할 참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 그것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섬기는 빛이 오늘을 또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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