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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0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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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주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사오니 주님의 교회를 언제나 자비로이 지켜 주시어 저희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2023년 3월 7일 (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1,10.16-20)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오늘 복음
    (마태오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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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복음
마태오 23장 1-12절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7일 (화)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5:4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7일 (화)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10

📌 강론시작 17:4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7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6:33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7일 (화)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2:20

📌 강론시작 1:09: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가까운 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라는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25,45).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율법을 삶의 중심에 두던 이들이고, 그들에게 율법을 따르는 것은 믿음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에서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계명과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기대하는 평판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낮추신 분이셨고 그런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해.

 

아이를 키운 적이 없어서 그 힘듦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음을 막연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데도 나름 최고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큰 존경심을 품습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더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부모의 자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선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리고 밝고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갑곶성지에서 만났던 한 어린아이가 생각납니다. 부모와 함께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정신없이 뛰놀았고 또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놀고 있으니 그동안 성물방에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저와 이야기하며 놀고 있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었지요. 어느 순간 말이 사라지고 대신 눈물을 터뜨립니다. 잘 놀던 아이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엄마 아빠가 없다는 생각에,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사라졌고 신나게 뛰어놀던 열정도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고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는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러 슈퍼마켓에 가시지도 않고, 성물 구입을 위해 성물방에도 안 가십니다.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또 열정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또 언제나 함께하시기에 계속 조잘거리며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가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야지만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말만 하는 기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고 말만 하는 기도를 통해서는 아무런 감응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고, 좋은 모범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정작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열심만 과시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말’의 나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진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만은 자꾸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스타 배우 유아인 씨의 불법 약물 뉴스가 많이 나옵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닙니다. 미국엔 대표적으로 린즈리 로한이 있습니다. 그녀는 1986년 7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가수, 배우, 여성 사업가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와 노래에 대한 열정을 가졌으며, 3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8년 12살 때, 뮤지컬 'The Lion King'에서 나라 공주 역할로 연기 데뷔를 하였습니다. 연기에서 최고의 스타가 된 그녀는 이제 노래 쪽으로 전향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틴 팝 스타로 대성하였습니다. 이어 사업도 하였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수천 번의 사고를 냅니다. 2004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peak'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Rumors'와 'Over' 등의 곡으로 히트 차트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 린즈리 로한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셀러브리티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도 하였습니다.

린즈리 로한은 만족을 모르고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범죄, 교통사고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인생의 곤경을 겪게 되었습니다. 린즈리 로한은 약물 중독으로 여러 차례 입소하여 치료받았으며, 불법적인 행위와 법적인 문제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녀는 무면허 운전, 교통사고, 도난, 폭행, 임신설 등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결국 음악 활동에서마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술기운인지, 약 기운인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36명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것이 언론에 공개되자 난리가 났습니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유부남들도 있었고 심지어 이름을 거론하면 안 되는 거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리스트를 즉시 부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채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결국 30대에 파산의 길로 들어섭니다. 린즈리 로한은 자기 행동으로 인해 팬들과 대중들로부터 실망과 비판을 받았으며, 그녀의 인생은 인기의 정점에서부터 인간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교만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그 이후 모든 인간이 그랬습니다. 이 교만을 꺾어줄 그리스도께서 오기까지는 이 원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것으로 스승이라 불리고 선생이라 불리고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합니다. 사실 제가 미사 때마다 외우게 하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는 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명예를 얻으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피이고 진리는 하느님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믿으면서도 남들이 스승이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것이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무언가 됩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면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는 칭찬받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남들이 칭찬할 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나를 낮추려 하지 말고 나를 무언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에 내가 반응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기에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반면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칭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어머, 하늘을 날고 계시네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인간을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칭찬에 으쓱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지려면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에 으쓱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열등한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내 힘으로 될 수 없는 수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취사선택의 도사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따라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을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이렇게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유행을 따르는 것이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망치는 길입니다. 

그리고 나쁜 친구가 아니더라도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기에 인생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작정 따라쟁이가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대로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이 있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에 단순한 요한이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따라쟁이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한숨 소리에 자기의 한숨 소리를 맞추었고, 프란치스코가 눈물을 흘리면 덩달아 눈물을 흘렸으며, 프란치스코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면 자기 손도 치켜들었고, 프란치스코를 본뜨려고 무엇이든 프란치스코를 따라 하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요한처럼 우선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제1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고, 그다음은 예수님을 잘 따른 성인들이며 하느님께로 그리고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할 사람을 선택해야겠지요. 

그런데 따를 대상을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성인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눈높이를 낮춘 상태에서 취사선택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수없이 선을 보고 다 퇴짜를 놓는 사람처럼 너무 눈만 높고 까탈스러워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대로 누구의 말과 행위에 있어서 따라야 할 것은 따르고, 말아야 할 것은 아니 따르면 되는데 실은 그것이 바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인이 있으면 성인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성인이 없어도 누군가의 좋은 점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나쁜 점을 따라 하지 않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가 가르치는 것은 그대로 하되 그들의 행실만은 따라 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외엔 인간 그 누구도 아버지로 여기지 말고, 주님 외엔 아무도 스승으로 여기지 말 것이며, 인간의 말과 행위 중에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면 따르고, 부합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식별할 주체적인 눈을 가져야겠지만 그렇다고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교만스레 다 퇴짜를 놓음으로써 아무에게서 아무런 가르침도 받지 못하는 그런 배움의 빈털터리, 따름의 빈털터리가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다만 취사선택의 도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각 사람의 장단점 중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잘잘못 중에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취사선택의 도사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눈뜨는 은총의 새날입니다. 낡은 방식을 멈추어야 새롭게 배우게 되는 올바른 삶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올바른 방식은 언제나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합니다. 

자가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참된 열매는 올바른 실행에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행위는 이웃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어 마음으로 진정 존중하면 올바른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스스로를 정화하는 아름다운 실행은 이와 같이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에 있습니다. 

참된 실행은 입에 있지 않고 참된 겸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참된 겸손 참된 실행의 참된 사순입니다. 낮추고 낮아지는 새로운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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