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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05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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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 얼굴을 찾으라 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2023년 3월 5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12,1-4ㄱ)
    아브라함을 하느님 백성의 아버지로 부르시다.

  •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1,8ㄴ-1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5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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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빛나는 구름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복음
마태오 17장 1-9절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5일 (일)
김선류 타대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1: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5일 (일)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27

📌 강론시작 18:41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5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49

📌 강론시작 10:0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다른 모습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때 목격한 제자들은 그 영광을 “해처럼” “빛처럼” 찬란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영광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 안에서 이미 예수님의 탄생은 빛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 빛에 이끌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빛은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길을 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복음은 그 이유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예수님의 영광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마르 16,12-13 참조).

예수님의 영광은 모습이 변하셨다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에서도 잘 표현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같은 하느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 예수님의 신원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인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가십니다. 사실 십자가와 영광은 서로 어울리지 않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의 영광과 빛이 드러나기를 고대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

 

매주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주로 신간을 먼저 보면서 관심 많은 분야의 책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치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휘프 바이선이라는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 심리학자가 자그마치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내놓은 치매 안내서와 같은 책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2021년에 주님 곁으로 가신 제 아버지가 말년에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공부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몇 차례의 큰 수술로 처음에는 섬망 증세가 오더니 결국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알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저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혼란을 주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소통 규칙, 치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 만들어 주기, 치매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할 수 있는 말 등등…. 저 자신이 얼마나 이 부분에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다름에 원망했고, 치매가 정말로 못된 병이라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의 모름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맞춰서만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판단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이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피정하면서 계속 이 피정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 계속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삶이 아닌 계속 움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무는 삶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쓰디쓴 시련으로 보이는 것들이 때로 변장한 축복일 수 있다.

- 오스카 와일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기도하면 오시는 두 분: 모세와 엘리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존 뉴턴이라는 성공회 신부가 노예선 선장을 하며 노예들에게서 들은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 런던에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와 성공회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여 늘 어린 뉴톤을 무릎에 누이고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뉴톤의 나이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뉴톤은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노예 무역선 선원이 됩니다. 그 당시 가축 이하의 대우를 받던 노예의 삶을 당연하게 여긴 존 뉴턴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된 뉴톤이 노예선 선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 해를 지나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엄청난 폭풍을 만납니다. 

폭풍우는 열하루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물을 퍼내며 사투하던 새벽 1시,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성난 폭풍 속에서 너무나 지쳐 기둥을 붙잡고 있던 뉴턴은 지난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었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잠언 1,23-33절이었습니다.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 내가 불렀건만 너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건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파멸이 너희에게 폭풍처럼 닥치고 불운이 너희에게 태풍처럼 들이치며 곤경과 재앙이 너희 위로 닥칠 때 나는 그렇게 하리라….”

그는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란 걸 하게 됩니다. 그는 이날을 제2의 탄생일로 삼고 1775년 선장직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의 나이 39세 때 성공회 사제가 되어 43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모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두 형태로 오시는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가르침이고 엘리야는 사랑의 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할 때 가르침과 보호를 주는데 이것을 진리와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위에서 존 뉴턴이 떠올린 잠언의 구절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에서 훈계가 진리이고 영이 은총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전했습니다. 진리를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 것은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서 은총과 진리가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마치 존 뉴턴이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늦게나마 새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은 당신처럼 기도하는 것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당신만이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정글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의 아빠가 급한 목소리로 “얘야, 얼른 땅에 바짝 엎드려라!”, “자, 이제 내게로 빨리 기어 와라!” 하고 시켰습니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아이와 선교사는 나무 위엔 길이가 5m나 되는 무서운 독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로 태어났고 선교사도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변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여 얻는 은총과 진리로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일, 이것만이 우리 부활을 약속합니다. 

야곱은 야뽁 강에서 하느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엉덩이뼈가 다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창세 32,23-33 참조). 덕분에 자신과 가족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비록 나의 죽음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진리와 은총으로 내 가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부활을 약속하는 삶입니다.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다는 법을 배우는 사순은 곧 기도를 배우는 시간이고 이것을 배워야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딴판이신 주님을 보며.

 

사순 제2주일의 주님은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주님이십니다.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과 시련을 받으신 주님과는 딴판입니다. 유혹을 이겨내고 시련을 통과한 다음의 빛나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례는 사순 시기가 아직 한참 남은 이때 어찌하여 영광스러운 주님 모습을 벌써 소개합니까? 아직 엄동설한인데 너무 성급히 싹을 내민 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시다시피 타볼산의 변모 사건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주님의 1차 예고와 2차 예고 사이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에게 예고편 중의 하나이고, 우리에게도 같은 예고편을 보여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예고편은 한편으로 각오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수난을 각오하고 부활을 희망하라는 예고편입니다. 

부활을 맞이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이요. 죽음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까이 봄과 멀리 봄의 대비이자 직시와 내다봄의 조화로서 우리는 반드시 가까이도 보고 멀리도 봐야 인생을 실패치 않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마지막 승리입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하고 중간에 화려해도 마지막이 실패이면 그 인생은 축구에서 정말로 멋지게 공을 몰고 갔어도 골을 넣지 못한 것과 같고, 전후반 90분 중 85분간 경기를 지배했어도 마지막에 골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의 인생에서 이 세상 삶은 미래 삶의 아주 짧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축구로 치면 전반 5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이 그의 인생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인은 이 세상 삶이 영원한 삶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믿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삶은 영원한 삶을 여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고 이 세상을 살면서 멀리 영원까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까지 내다봅니다. 

그래서 영원과 영광을 내다보며 지금 엄혹한 고통을 직면하고 직시하고, 각오하고, 감수하고, 감당하고, 이겨냅니다. 찬란한 봄을 내다보고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세 제자와 같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수난 너머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고통 한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절망 한가운데서 희망을 내다보며 그러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희망을 증거 하는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삶을 예수님과 함께 바라봅니다. 삶도 사랑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함께 나눌 변모의 방식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을 몰랐기에 변모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변모해야 할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고통뒤에 부활을 얻습니다. 고통속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희망하는 법을 잊은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고통과 부활의 거리는 사랑하는 마음의 거리입니다. 사랑으로 변모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없이는 그 누구도 빛날 수 없습니다. 환히 열리는 것이 신앙이며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변모입니다. 

부활을 믿고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하면 바뀌고 사랑하면 빛납니다. 사랑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회개하는 새로운 만남의 기쁜 주일입니다. 사순은 부활을 믿고 준비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변모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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