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04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4.
반응형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마음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필요한 그 한 가지만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2023년 3월 4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26,16-19)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 오늘 복음
    (마태오 5,43-48)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4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복음
마태오 5장 43-48절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4일 (토)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6:4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4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41

📌 강론시작 17:5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4일 (토)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25

📌 강론시작 12:4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4일 (토)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3:47

📌 강론시작 1:14: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함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미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9,18)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이웃”은 ‘동포’의 뜻이 강합니다.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표현이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새로운 차원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에 밝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구약 성경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민족들에 대한 언급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신명 23,3-6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도록 가르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새로운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동포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그토록 강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를 넘어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는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 그치지 말고 그것을 넘어 하느님을 닮도록, 그분의 완전하심을 닮도록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함은 세상이 말하는 완전함과는 다릅니다. 그 기준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사람들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들은 의사만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질병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모든 직업은 고귀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노고가 제일 대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밖에도 우리의 일생을 지켜 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택배 기사, 버스 운전사, 음식 배달원, 요양 보호사 등등…. 이들도 코로나의 위협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켜 준 고마운 분들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막 부려 먹는 종으로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갑질의 모습이 들려왔고, 실제로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자기 삶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병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얻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낙인을 찍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로 어루만져주듯 하나하나 손을 대 치유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도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있기는 했지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을 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했어야 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이스라엘은 늘 약자였습니다. 주변 국가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에 실려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글귀.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이라면 더 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하느님께서 소중한 자녀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불행은 과학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불행은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원수를 사랑하기 전에 이것부터 연습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실천법으로 이렇게 하시는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곧 죄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법입니다. 원수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내가 심판하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려면 심판을 멈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3-4.8-9)

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차별의 예로는 L.A.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한 흑인 학생이 도둑이고 그가 총을 꺼낸다고 여겨서 총을 쏴서 살해한 사건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한다면 나도 분명 차별받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먼저 내가 차별받지 않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 ‘크래쉬’(2004)는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어떻게 해야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 도로 한 복판에서 울리는 총성. 젊은 백인 경찰관 핸슨이 한 흑인 청년을 쏴 죽입니다. 

핸슨이 흑인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흑인 청년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자 위협을 느껴 자신도 모르게 총으로 그 청년을 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흑인 청년은 둘 사이에 꽤나 재미난 공통점을 공유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흑인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려던 것은 당지 작은 성 크리스토포로스 조각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흑인 청년을 쏴 죽인 이 ‘핸슨 결찰관’은 불과 36시간 전의 대낮에는 다소 의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선배 경찰관인 라이언의 인종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상관에게 근무 파트너를 바꿔달라고 청했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극도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차별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본인이 차별과 편견의 굴레에 살고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에게 라이언 경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아?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몰라!”

아마 핸슨이 불과 이틀도 안 되어 차별의 굴레 안에서 살인을 저지를 것을 알았던 것일까요? 이 영화에서는 아랍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은 한 사람이 멕시코인 열쇠 수리공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차별받지 않는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차별받는다고 느끼면 그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정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천대 받던 시절, 수학 천재 라고 불리던 흑인 소녀가 수많은 차별속에서 결국 NASA에서 인정받기 까지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6학년인 나이에 대학에서 자신의 뛰어난 수학실력으로 교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인정받음으로 견디기 힘든 인종차별을 견뎌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냅니다. 그때 교수가 백묵을 주며 문제를 풀어달라는 청을 받은 것처럼, 나사에서도 그를 지지해주는 백인 상관으로부터 백묵을 받아 정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문제를 풀어보입니다. 

예수님은 차별받지 않으셨을까요? 성모님은 차별받지 않으셨을까요?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차별받는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인정받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당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차별받지 않는데 누구를 차별하겠습니까?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이미 죽었고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는 수밖에.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깜냥 사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완전한 자 되려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고,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처럼 되라 하십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이렇게 돼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율법에서 저렇게 얘기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시지요.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니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도전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깜냥’이라는 순우리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가늠해, 해낼 만한 능력’이라는 뜻이고, ‘깜냥깜냥’이라는 부사는 자신의 힘을 다한다는 뜻이며, 그래서 보통 ‘너는 그것을 해낼 깜냥이 안 된다.’라는 식으로 쓰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럴 깜냥도 안 되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수 사랑을 말씀하셨을까요? 

바꿔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 깜냥을 가늠할 능력이 없으셔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랑 깜냥을 모르고 하신 말씀일까요? 

당장은 안 됩니다. 당장은 깜냥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생각하신 겁니다. 아니, 사랑할 거라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미리 접습니다. 

주님께서는 멀리 보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인데 우리는 당장의 나를 보고 나를 믿지 못하고 나의 미래까지 접어버립니다. 

원수 사랑하는 것은, 지금 어려운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어주시는 주님의 믿음에 배신하지 말고 우리도 자신을 믿고, 한번 도전해보라는 주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사랑의 의지를 세우고, 그러나 시작은 작은 원수부터, 차츰 큰 원수까지 사랑하면 됩니다. 

욕심은 이런 욕심을 가져야 합니다. 욕심을 가진다면 이런 욕심을 가져야지 허접스러운 욕심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욕심내지 말고 사랑을 욕심내야 한다는 말이고, 사랑을 욕심내더라도 만만한 사랑이 아니라 원수 사랑을 욕심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깜냥을 믿어주시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깜냥깜냥 원수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가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 당부의 말씀이 우리의 안일한 삶을 흔들어 다시 일으킵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버림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최선의 지혜는 온전한 사람 온전한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고 깨우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보살피고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관계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하늘의 아버지 마음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가 깨끗한 믿음으로 완전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각박하고 변덕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부터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나 중심으로 살아온 습관을 바꾸어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것은 진실한 기도 온전한 사랑 완전하신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슴을 때립니다. 마음을 닦는 사순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