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소서. 제 탄식을 들어 주소서.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제 기도 소리 귀여겨들으소서.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3년 3월 2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에스테르기 4,17(12).17(14)-17(16).17(23)-17(25))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7,7-12)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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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복음
마태오 7장 7-12절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12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2일 (목)
김우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7:3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2일 (목)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35
📌 강론시작 16:3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5
📌 강론시작 06:2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2일 (목)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1:46
📌 강론시작 1:09:11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기도의 바탕은 믿음이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세 구절로 표현되는 예수님 말씀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청하기는 기도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특히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유다교 라삐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기도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빵과 생선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는 기본 음식입니다. 그리고 돌과 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유혹에서도 언급되듯이, 빵과 생선에 견주어 보면 먹을 수 없는 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비교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고 유익한 것을 많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믿음은 기도의 바탕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는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는 이 가르침으로 정리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가장 큰 계명의 구체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망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문을 두드려라.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차 사고를 연출한 장면을 보여주기 전에, “차가 부딪쳤다.”라고 설명해주고 보여준 그룹과 “차가 박살 났다.”라고 설명하고 보여준 그룹의 기억 차이를 비교한 것입니다.
그 결과 ‘차가 박살 났다.’라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그 장면에서 ‘차의 유리 파편이 튄 모습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여준 사고 장면에는 그런 모습이 없었습니다. ‘박살 났다.’라는 강한 표현의 단어를 들은 것만으로도 사고가 크게 났다는 느낌이 마음에 남았고, 그로 인해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돌이킬 때 유리 파편이 날리는 모습까지 같이 떠올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은 거짓 기억 또는 잘못된 기억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만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억이란 결코 바뀔 수 없는 명확한 기록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때로는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의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어쩌면 우리의 거짓 기억, 잘못된 기억에 따른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용서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가득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추지 말고 바라는 것을 청하고, 포기하지 말고 얻을 것을 찾을 것이며, 망설이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사랑이 아닌 이웃의 만족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을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기억과 거짓 기억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자신보다 나아질 것을 목표로 삼으라.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께 누군가가 청하면 정말 다 들어주시느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다 들어주실까요? 대부분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 믿으시는 것은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청을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고의 조건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느닷없이 나오는 이 말씀에는 조건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는 ‘이웃 사랑’을 뜻합니다. 역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계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이 여호수아서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을 차지하여 살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을 사방으로부터 평온하게 해 주셨다. 모든 원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던 것이다. 이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하신 그 모든 좋은 말씀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여호 21,43-45)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땅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법이 지켜지는 나라입니다.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지켜져야 했던 것은 주님께 선악과를 봉헌하고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습니다. 이 계명이 십계명에 그대로 나타나고 주님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지키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도 하느님 나라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순종하지 않아 하느님 나라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소리가 그분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간증 중에 중요한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선 동안교회 신도수가 늘어나자 91년도에 50억 정도의 예산을 잡아 새 교회를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한 것입니다.
“50억은 큰 돈입니다. 우리가 50억 교회를 지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5억짜리 개척교회를 짓고 50억짜리 교회를 지으면 쉬울 것입니다.”
십일조를 생각한 것입니다. 신도들이 다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때 성전건축을 위해 6억 정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개척교회를 먼저 짓고 자신들의 교회는 나중에 짓자며 6억으로 개척교회를 하나 내 주었습니다.
일산 동안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나중에 크게 성장하여 김해에 20억짜리 개척교회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일산 동안교회를 짓는 동안 재정에 네 배 늘어서 아주 쉽게 100억짜리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두 배 큰 예배당을 두 배 쉽게 지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청이 들어지는 순서입니다.
이분은 이웃 사랑에 대한 간증도 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할 때 대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다 나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을 위한 공장과 사업을 위해, 곧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200억을 모아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성전을 지으면 됐습니다.
하지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것으로 탈북자들이 일할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고는 교회를 네 개로 분리하여 각자가 새로운 자리에서 새 교회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 교회는 지금도 매우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님의 예를 들어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분의 정신은 참으로 오늘 복음에 맞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그분의 나라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분은 에덴동산에 계십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바칩시다. 그리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런 상태에서 구하는 것은 반드시 다 들어주십니다.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구할 때 그 목소리가 주님께 들릴 수 있는 곳에는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을 때
오늘 독서는 에스델기로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에스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에스델이 제게는 참으로 존경스럽고 감탄하게 하고 나도 같은 상황이 되면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케 합니다.
오늘 독서의 시작을 보면 에스델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얘기하고, 그러나 이어서 주님께 피신처를 찾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랑의 경우, 다시 말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의 경우, 공포에 사로잡히면 공포 이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두려운 것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하느님도 볼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분이 되시는 겁니다.
거듭 얘기합니다. 두려움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면 하느님도 아무것도 아닌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두려움에 싸였을 때 두려움 외에 아무것도 내게 보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그때 내게 아무것도 아닌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공포에 휩싸일 때도 그리고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도 에스델처럼 하느님께로 눈을 돌려 청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델처럼 하느님 외에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청할 때 오늘 주님 말씀처럼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 믿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마음이 없으면 기도도 없고 기도가 없으면 간절한 마음도 없습니다. 기도에 언제나 성실하게 화답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간절히 청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 속에 진정한 삶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알게되는 가슴 저리도록 고마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로 살게하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가장 깨끗한 시간은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의 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는 그것마저 내려놓습니다.
기도는 반성이며 기도는 감사이며 기도는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는 가장 좋은 오늘입니다.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만나는 기도의 힘찬 발걸음 기도의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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