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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0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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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원수들이 저희를 짓누르지 못하게 하소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모든 곤경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주님, 이 백성의 정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절제하고 극기하며 선행을 실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3년 3월 1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나서 3,1-10)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오늘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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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복음
루카 11장 29-32절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1일 (수)
임시백 치백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8:0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1일 (수)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7

📌 강론시작 17:00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40

📌 강론시작 09:08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일 (수)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0:38

📌 강론시작 1:10:5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오늘 복음은 조금은 불편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루카 복음사가는 ‘세대’라는 표현으로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7,31; 9,41 참조). 특별히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기적만을 찾는 당시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에게 요나가 본보기가 됩니다.

제1독서에서 전하는 것처럼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에서 하였던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이 선포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이가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면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하느님 말씀과 선포에 있습니다. 그는 어떤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선포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요나 예언자와 비교됩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요나처럼 먼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 어느 기적이나 표징보다 중요하며, 그 바탕에는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진정한 변화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

 

어느 형제님을 만났는데, 하느님께서 자기 청원을 전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십니다. 정말 열심히 되풀이해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내용을 여쭤보니,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탐한 것도 아닌데, 사랑의 마음을 달라는 청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와 함께 있는 것조차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미움의 마음이 가득하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청했던 것인데, 그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으니 하느님께서 혹시 사랑의 실천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의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분의 청원을 전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실성을 헤어린 뒤의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 목적을 달성할 힘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는, 입으로 내뱉는 말로써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 얼마나 진실한지에 따라 판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원이 들어져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기 청원이 이루어졌는가를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나의 성실성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실성을 가지고 노력할 때, 하느님께 드린 청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표징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실성이 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향해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다고, 그래야 당신을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빵의 기적도 있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또 마귀도 쫓아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당신의 표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자신의 성실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성실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표징만 보여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많은 청원 기도를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자기 성실성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표징은 자기 성실성에서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은 운명의 주인이다. 스스로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방향을 바꾸고, 통제할 수 있다. 당신을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창조할 수 있다.

- 나폴레온 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배의 3요소와 그 순서의 중요성

 

슈퍼맨이 될 수 있음에도 슈퍼맨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 소년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더 보이’(2019)입니다. 한 아이가 어떻게 좋은 부모 밑에서 사악해지는지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는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버트가 12세 생일을 맞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버트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노력과 사랑을 받아 건강하게 자란 아이입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이한 이후부터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면서 그의 성격과 행동이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모보다 엄청난 능력을 지닌 자신이 부모의 아들일 리 없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아이는 자꾸 자신이 부모의 자녀가 아니라 우주에서 날아온 슈퍼맨과 같은 존재라고 믿어갑니다. 그리고 점점 더 부모의 말보다는 자신이 타고왔다고 믿어지는 우주선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바로 지구를 차지하라는 목소리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점점 자신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부모는 걱정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럴수록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악영향을 미칠 그를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너무 세졌습니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버트는 부모의 대항을 뚫고 이웃 마을로 가게 되는데, 그 마을에서 버트는 더 많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마을을 파괴합니다. 

마지막에는 버트의 아버지는 그를 정지하고자 하는데 실패하고, 버트는 아버지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 어머니를 살해하고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아이가 사춘기 때 빗나가게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처음엔 부모가 자신의 출처일 수 없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는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부모가 아이의 영혼까지 넣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인정하지 않게 되자 아이는 더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부모라 믿게 할 수 있는 음식과 희생 또한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3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봉헌-말씀-성체’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아이는 먼저 부모를 자기 창조자로 고백해야 합니다. 

성막으로 치자면 뜰에서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제물을 봉헌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이 성막의 성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 봉헌되는 빵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는 아이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순서를 어긴다면 부모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배우겠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 다음이 성체입니다. 성체는 표징입니다. 하느님께 배우려 하지 않으며 믿음만 요구하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부모 앞에서 잔소리 말고 밥이나 차리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세대가 악한 세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거치지 않고 표징만을 원하는 이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이들을 심판할 이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온 남방 여왕과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드릴 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바로 설교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는 표징입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위한 지혜를 주고 성찬의 전례는 믿음을 줍니다. 

요한 복음에서 첫 표징은 카나의 혼인잔치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믿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은 말씀만으로는 불가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신성을 가지게 되었음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체 이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전례 이전에 봉헌이 있습니다. 

요즘은 누가봐도 봉헌과 말씀이 약해졌습니다. 봉헌을 통해 하느님이 주님임을 인정하지 않고 강론이 길면 빨리 성체만 영하고 집으로 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순서를 어기는 게 악한 것입니다. 

부모를 인정하는 봉헌이 없으면 말씀이 약해지고 말씀이 약해지면 부모의 가르침은 거부하면서 밥만 먹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표징은 성체성사도 소용없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순서를 잘 지켜서 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완고한 마음, 간절하지 않은 마음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요나 얘기라는 점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줄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요나의 표징이란 어떤 의미인지 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표징이란 하느님의 표징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표시거나 하느님 친히 그렇게 하셨다는 표시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그 개망나니가 사람 됐다.’라는 표현을 가끔 썼습니다. 망나니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사람을 일컫지요. 

그런데 그 개망나니가 개과천선했다면 분명 어떤 곡절이 꼭 있었을 거라고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를 바뀌게 한 것임이 드러나면 사람들에게 그 개망나니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겠지요. 

아무튼,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요나가 바뀐 것, 곧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요나가 회개한 것은 니네베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고집부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니네베 사람들이 알기에 그런 그가 자기처럼 죽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거지요. 

이렇게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가 하느님의 표징이 되어 회개했는데9이스라엘인들이 요나보다 더 큰 표징인 주님을 보고도 회개치 않고9다른 표징을 요구하니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하다고 하시며 당신 외에 다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주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악합니다. 그리고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불행한 족속입니다. 

왜 악합니까? 

우선 그들은 표징을 요청하지 않고 요구합니다.겸손하게 청하지 않고 교만하게 요구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리 간절하지 않거나 하느님 나라가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한 번 설득해보라는 식이고, 나의 이 완고한 마음을 깰 수 있으며 깨고 돌릴 수 있으면 한번 돌려보라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완고한 마음과 간절하지 않은 마음 소유자가 나는 아닌지 니네베 사람보다 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는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반가운 3월의 첫날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다리던 봄이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표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어떤 것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예수님의 뜨거운 삶이 우리의 참된 표징입니다. 

뜨거운 표징을 먹으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표징의 여정은 사람을 품고 사람을 용서하는 회개의 여정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표징이 열리면 하느님의 나라가 열립니다. 표징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올바른 표징은 생활로 드러납니다. 

표징이 끊어지면 회개도 끊어집니다. 표징의 사람은 다름 아닌 회개의 사람입니다. 회개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반성없는 표징은 우리의 신앙을 주저앉게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더 깊어지는 예수님의 표징입니다. 

표징으로 사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은총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십자가에서 뜨거운 피가 떨어져 내립니다. 뜨거운 표징 뜨거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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