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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25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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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너그러우신 자애로 저희에게 응답하소서. 주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희를 돌아보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나약한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살피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오른팔로 보호하여 주소서.

 

2023년 2월 2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58,9ㄷ-14)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오늘 복음
    (루카 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25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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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복음
루카 5장 27ㄴ-32절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25일 (토)
양우철 예수의 야고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5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25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10

📌 강론시작 17:14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25일 (토)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8

📌 강론시작 06:5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t. Matthew, Caravaggio)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t. Matthew, Caravaggio)

 

성 루도비코성당 카라바조의 그림 : 성 마태오의 소명

 

오늘 복음은 레위(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고 나서 하신 어느 인터뷰에서 오늘 복음과 관련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되기 전) 로마에 올 때마다 저는 스크로파(로마의 길 이름)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자주 성 루도비코(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 가면 늘 카라바조 (Caravaggio)의 작품 성 마태오의 소명 (The Calling of St. Matthew)을 바라보며 묵상하였습니다.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손가락은 마태오를 가리킵니다. 그것은(세리 마태오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마태오와 같습니다. 그림 한가운데 탁자 위에 놓인 돈을 움켜쥐고 있는 마태오의 손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이 돈은 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눈길로 돌아보신 죄인입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 ‘프란치스코 교황과 인터뷰’, 2013년 8월 19일). 

이 그림은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한번 이 작품을 찾아 감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길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봅시다.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움켜쥔 손, 탁자 위의 동전들, 탁자에 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과 앉아 있는 자세에서 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비추는 환한 빛, 그리고 빛과 함께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눈과 나를 가리키는 그분의 손,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건네시는 말씀, “나를 따라라.”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분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손을 펴고 바라보며 일어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홍소를 터뜨렸다의 홍소 뜻 아시나요?

 

저는 외국어를 잘 못합니다. 솔직히 언어에 재주가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노력 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말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군요. 
 
책을 읽다가 ‘홍소를 터뜨렸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소’. ‘소’자야 웃음 소(笑)일 것 같은데, ‘홍’자는 한자로 무엇일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넓을 홍(弘)일까요? 아니면 붉을 홍(紅)일까요? 그래서 사전을 보니 홍소(哄笑)에서 ‘홍’은 ‘떠들썩할 홍’이었습니다. 매우 크게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가 제 형제들과 함께 전주 한옥마을에 간적이 있습니다. 이때 묵은 한옥팬션 이름이 ‘서로’였습니다. 짝을 이루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인 ‘서로’라고 생각했는데, 한자로 ‘서로(徐路)’라고 쓰며 천천히 걷는 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외국어를 잘 못해도 우리말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말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이 역시 노력 부족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알 것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득 주님께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그 길은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을 알려고 온 힘을 기울일 때, 그 간격은 좁아질 것입니다. 혹시 그 좁아짐에 기뻐서 주님도 또 자기 자신도 ‘홍소’를 터뜨리지 않을까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당시에 세리의 직분은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니 세리는 더 돈 욕심을 세웠고, 정의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도 부르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손길에 달려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죄인들 모두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밝히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일에 스스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가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이해되지 않는다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기뻐서 ‘홍소’를 터뜨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홍소’를 터뜨리실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

- 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한 사람 주위엔 잔치가 벌어진다 .

 

영화 ‘패터슨’(2016)은 미국 뉴저지의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이름의 버스 운전수의 일주일 간의 일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을 하며 일상의 작은 것들로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 시를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시리얼로 아침을 대신하고 출근합니다. 버스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말들과 일상의 작은 변화들로 미소를 짓습니다. 돌아와서는 강아지와 산책하고 긴장을 풀기 위해 바에서 한 잔 마시기도 합니다. 

이때 패터슨은 바 주인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도 하고 실연당한 남자와 옆자리에서 술을 마셔주기도 합니다. 아내가 비싼 기타를 사겠다고 하는 것도 잘 참아냅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지만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패터슨이 쓴 시를 출판해보자가 제안합니다.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러자고 합니다.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강아지에 의해 시가 담긴 노트가 산산조각 난 것을 발견합니다. 패터슨은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강아지가 밉습니다. 실연남을 길거리에서 다시 만났는데 위로해 줄 힘이 없습니다. 강아지 없이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혼자 신세한탄합니다. 이때 어떤 동양인이 와서 노트 한 권을 줍니다. 새로운 노트에 시를 써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이 다시 시작됩니다. 

패터슨에게 시를 쓰는 노트는 모든 일상을 감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이것 저것을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 됩니다. 그러면 일상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신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되듯이 패터슨은 시를 쓰는 것을 돈벌이로 여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을 감사가 아닌 돈을 버는 목적이 되게 합니다. 시선이 바뀌고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도 위로할 수 없고 짜증만 납니다. 다시 자기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이것을 회개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라는 세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라는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릅니다. 레위는 이것이 고마워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것에 분개합니다. 그리고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레위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고마워 잔치를 베풉니다.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 내어놓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덕분에 다른 이들도 그 잔치에 참여합니다.
 
한 죄인이 회개하면 이렇듯 가진 것을 내어놓기 때문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회개한 죄인 주위에는 그래서 즐거움이 넘치고 하느님 나라가 형성됩니다. 회개는 다시 일상의 고마움을 찾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자로서 모든 일이 감사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회개한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잔치가 됩니다. 

큰가시 물고기의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있습니다. 아빠 물고기가 새끼들이 부화할 때까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지키고 산소를 공급하다가 결국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아빠의 살로 잔치를 벌입니다. 

회개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빠, 엄마들은 자신들이 아빠 엄마가 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자신들도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 어머니의 살과 피를 통해 잔치를 벌입니다. 즐겁게 웃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즐거우라고 그리스도께서도 회개하시어 당신 살과 피를 내어놓으십니다.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에 따라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 잔치가 말씀과 성체의 미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위에는 잔치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나는 회개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꼭 필요한 사람

 

어제 저는 악행을 끊고 선행을 하고 욕망을 끊고 사랑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라고 아주 짧은 강론을 한 바 있는데 오늘도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회개가 바로 사랑과 선행이라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단식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과 선행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이 고생하는 이를 흡족하게 하고, 병든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지금 세계적으로는 전쟁과 지진이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고, 멀리 가지 않고 우리 주변만 해도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 많은데 자기 건강이나 몸매를 위해 우리가 단식한다면 그것은 너무 한가한 짓이고, 주님을 위해 단식한다 해도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지요. 

비근한 예로, 지금 형제가 가난하고 병까지 들었는데 그런 형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모에게 보약을 지어드린다면 그 돈으로 형제 도우라고 하시지 보약 드실 부모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보약이 필요 없고 우리의 사랑도 필요 없습니다. 보약이 필요하고 우리 사랑이 필요한 것은 가난하고 병든 이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지 하느님께 애정결핍이 있으시거나 그래서 우리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하느님은 Self Sufficient God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으시고, 하느님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하시고 자체적으로 흡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이웃을 흡족하게 하라고 하시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흡족하게 하실 거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불만이 많고 우리의 불만을 채워달라고 자주 징징대는 사람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어떤 때는 하느님께.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남을 흡족하게 하냐고 또 징징댈 수 있는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하느님과 복음의 주님은 이제 애 짓은 그만두라고, 언제까지 애처럼 젖 달라고 징징댈 것이냐고, 이제는 네 젖을 아기에게 물릴 어른이요, 엄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건강하다. 

너는 사랑할 수 있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무엇이 사랑인지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죄인을 먼저 선택하시고 죄인을 다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의인인양 착각하는 우리들을 꾸짖으십니다.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더는 의인인양 의인의 흉내를 내지 않겠습니다. 

죄인에게서 사랑을 찾아내시는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조각난 삶을 맞추어 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죄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모두는 회개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공동체의 특별한 비밀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입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죄인들의 회개하는 공동체를 이 땅에서 건설하십니다. 

회개 속에서 더욱 빛나는 죄인들이 사순의 길을 걸어갑니다. 희망은 부정할 수 없는 치유자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든 삶을 치유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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