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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2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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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내 목소리 들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대적하여도 나를 구하시리라.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주님,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2023년 2월 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신명기 30,15-20)

  • 오늘 복음
    (루카 9,22-25)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23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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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
루카 9장 22-25절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23일 (목)
양우철 예수의 야고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1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23일 (목)
진슬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5:20

📌 강론시작 22:45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23일 (목)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09

📌 강론시작 09: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주님과 함께 걷는 삶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교회는 우리에게 모세(제1독서)와 예수님(복음)의 공통된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셨고, 그것을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선택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2015년 2월 19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강론 참조). 매일 매번 선택하는 것보다 습관과 타성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을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라고 호소합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벗고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새롭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세례로써 새로운 삶을 선택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이 돌아서서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며’(신명 30,17 참조)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기보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제목 ‘코지 판 투테’(‘모두가 그렇게 한다’)처럼, 다른 이들이 하는 대로 많은 이가 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기 인생이 어떠한지 스스로 두 가지 질문을 해 보라고 권고하십니다. 

첫째, ‘나에게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그래서 ‘나는 오늘 주님을 선택하고 있는가?’ 

둘째, ‘나와 내 부모, 내 형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느님과 가족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들에 몰두해 있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는” 삶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다시 선택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를 버린다는 것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향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정상일까요? 비정상일까요? 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력을 쓰는 사람과 동조해서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똑같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둘러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어떨까요? 모두 비정상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고 합니다.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악성 댓글을 달고, 또 여기에 동조해서 또 다른 악성 댓글을 남깁니다. 이런 악성 댓글이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과 어떻게 같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성 댓글을 당하는 당사자들의 뇌에서는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얻어 맞을 때의 똑같은 고통의 경험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즉, 뇌에서는 칼이나 몽둥이로 맞는 것처럼 엄청난 상해를 받은 것을 깨닫습니다. 
 
악성 댓글뿐일까요? 친구 사이에서도 이상한 소문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은 말로만 했을 뿐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칼에 찔리거나 둔기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을 뇌에서 느끼게 됩니다. 엄청난 폭력입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말로도 이 계명을 어길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늘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만의 정의를 외치면서 살인을 범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나부터가 말과 행동을 조심하면서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에서 절대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주님께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버릴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자기를 드러내려는 이기심으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님과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욕심과 이기심이 차고 넘쳐서 더 힘든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과거 때문에, 혹은 미래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알랭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생명을 투자하는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틀을 보면 조금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투자하면 투자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말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생명을 내어놓음입니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열정(passion)이라고도 하는데 이 열정은 또한 수난(passion)을 전제합니다. 열정이나 수난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무석 교수가 의무관이었을 때 본 자해하는 청년은 몸에 피를 내지 않으면 살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없어서 계속 자해를 한다고 했습니다. 피를 내는 것은 수난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열정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사랑해서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내 피를 쏟을 목적이 없다면 삶의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두 주인공은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남자는 고아로 자라서 애인에게 배신 당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여자는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어머니에게 외면당해서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내 피를 쏟을 수 없다면 스스로 피를 내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 없는 삶은 열정이 식은 삶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라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들을 위해 피를 흘리면 될까요? 돈과 쾌락과 명예를 위해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게 다야?”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들은 마치 공갈젖꼭지처럼 아무리 빨아도 영양분이 오지 않고 결국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는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어차피 무언가를 위해 목숨, 곧 피를 쏟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목적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의 피 흘림, 아기를 기를 때의 피 흘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욕도 잃지 않고 투자한 만큼의 생명을 되돌려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낳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투자는 더 많이 벌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무언가를 사랑할 때 하게 됩니다. 투자로 나의 피, 곧 생명을 바치게 되는데 그 피, 곧 생명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는 게 상책입니다. 투자를 하지 않거나 투자비용이 회수될 수 없는 곳에 투자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 회사는 망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거나 생명을 되돌려받을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투자하며 살아야 한다면 투자비용이 더 회수되는 것에 투자하는 게 낫습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이 오는 것에 투자해봅시다. 

마더 데레사 효과라고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모습만 봐도 면역력이 증가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실험결과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삶은 이 세상에서부터 투자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어줍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합니다. 그러다 주님께서 계셔서 영원한 생명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지 않거나 공갈젖꼭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맙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투자한 만큼 이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해야 살 수 있습니다. 올바로 투자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려면 매달려야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주제는 생명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삶일지 얘기합니다. 그 방법에 대해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의 명령인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되고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 단어를 나열하면 계명-생명-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 생각에 여기에 순명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순명-생명-행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무릇 모든 생명은 창세기 1장의 얘기대로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하였기에 생명이 된 것들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생기라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그걸 보시고 좋아하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이 생명 맞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탄생 자체가 하느님 명령에 순명한 결과이니,생명을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명령에 달렸다는 것이 신명기의 가르침이고 구약성경이 내내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명령은 죽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생기라는 명령이고 제발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하라 마라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도 명령조로 얘기하면 싫어하고,,부탁하면 하려고 했던 것도 명령조면 하기 싫어집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사람처럼 그렇게 반항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를 먹으면 사태를 파악하고 굽힐 줄 알지만 젊었을 때는 젊은 혈기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들 듯 살라는 명령도 명령이니 따르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의사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숙하고 현명하다면 생명 앞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에 고집부리지 말고 겸손해야 하듯 하느님 명령에는 더더욱 겸손해야 하고 순명해야 합니다. 의사의 명령은 잘 들으면서 하느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살려면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대로 당신을 따르면 진리의 길을 걷고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길이신 주님을 따라 가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기 때문이니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길잡이신 당신을 잘 따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신명기의 마지막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하느님을 찾게 하는 십자가를 모른 채 살았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주님께서도 십자가와 함께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는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알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가는 하느님 나라를 십자가로 만드십니다. 자아의 무게 만큼 십자가의 무게 또한 무겁습니다. 우리 자아가 붙들고 있는 그것 마저도 놓아 버리게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사람은 철이 듭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사랑입니다. 스스로 사랑이 되지 않고선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십자가가 십자가에게 말을 건넵니다.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오히려 십자가가 우리를 돌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닮아갑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사랑의 영광, 십자가를 집니다. 십자가의 인격을 날마다 먹고 사는 우리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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