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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2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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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그를 해방시켜 영예롭게 하리라. 오래오래 살도록 그에게 복을 내리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해마다 거룩한 성사로 사순 시기를 지내는 저희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달아 회개의 삶으로 그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2월 26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1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2,7-9; 3,1-7)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

  • 제2독서
    (로마서 5,12-19)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4,1-11)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2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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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복음
마태오 41-11절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26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2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26일 (일)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53

📌 강론시작 18:50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26일 (일)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1

📌 강론시작 09: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하느님을 닮을 것인가 악마를 닮을 것인가?

 

해마다 사순 첫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겪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의 아담과 달리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기신 새 아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 아담이실 뿐만 아니라 새 이스라엘이시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살기를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그분께서는 온 삶을 하느님 손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적어도 세 번 유혹을 받았습니다(탈출 16장; 17장; 32장).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첫 번째 유혹은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먹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무려 901번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빵을 내려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만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나를, 곧 재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또 날마다 주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쌓아 놓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청하도록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두 번째 유혹은 우리가 하느님을 두고 겪는 가장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테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체된다고 여길 때 그분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정말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에 응답하시어 기적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위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에도 당신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의 요구대로 바꾸어 기적을 행해 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유혹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빛과 희망을 주시기를 청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여러 번 유혹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에 대한 오롯한 믿음으로 언제나 악마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으로 군림할 것인가 봉사할 것인가?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거짓 신을 섬길 것인가? 하느님을 닮을 것인가 악마를 닮을 것인가?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태어나자마자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지금 능숙한 모든 일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 버벅거렸고, 실수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반복과 연습을 통해 능숙하게 또 ‘잘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걷는 아이가 있을까요? 말은 어떻습니까? 또 글 쓰는 것 역시 처음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원래 잘했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은 펜을 잡는 손을 바꿔서 써보십시오. 아마 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앞으로 걷지 말고, 뒤로 걸어보십시오. 평상시에는 너무나 쉬웠던 걷기가 뒤로 걸을 때는 그렇게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과 연습을 통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깨닫는다면, 포기와 좌절이 얼마나 잘못된 감정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왜 나는 운이 없을까? 왜 나는 잘하지 못할까?’ 등의 말은 모두 반복과 연습의 부족에서 나오는 말일 뿐입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실수 끝에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수천수만 번 넘어진 뒤에 지금 잘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수천수만 번 글씨를 적다 보니 능숙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았는데, 커서는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좌절할까요? 바로 남과의 비교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는 비교 대상이 없습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면서 비교 대상이 보입니다. 그들보다 늦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과 비교하면서 하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성장시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과 연습이라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단식한 뒤였습니다. 배고픔과 피곤함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태에서 악마는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즉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보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혹은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시겠다는 유혹이었지요. 
 
이 모든 유혹은 오로지 성경 말씀으로만 이겨내십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에만 집중하니 그 유혹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광야에서의 사십일의 시간, 어쩌면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하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이 아닐까요?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면서, 늘 그 뜻에 맞춰 살 수 있는 반복과 연습의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멋지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불행은 그 사람의 위대함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 파스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유혹을 이기는 법 : 말씀의 검을 갈아놓으라.

 

인터넷에서 어떤 가톨릭 신자의 이런 근심거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한 젊은 여자가 누군가를 도와주러 지방에 가게 됐는데 일이 끝나고 주인 사모가 사례를 못해서 미안하다며 다른 분에게 무당집 복비를 건네주며 그 자매를 꼭 데려가서 점을 보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식사하러 가는가 했더니 무당집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하루 휴무를 풀로 도와주고는 기분 완전히 잡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집안 모든 식구가 성당엘 다니고 자신은 여유가 없어서 계속 못 갔는데 최근 들어 어떻게든 다녀야겠다고 맘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당이 자매보고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 할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무당은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그 자매의 앞날에 재수 없는 일들이 많을 것이라 겁을 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고 절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무당이 되어야지 되던지 안 그러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반드시 병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권태기인데 그 사람과도 끝장이 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무시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 충고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은 ‘기도’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한 자매가 무당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안 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몸도 아프고 가족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요즘 누가 무당이 되고 싶겠느냐며, 그러나 자신은 어쩔 수 없다며 무당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탄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느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십니다. 다시 말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말싸움에 져서이고 유혹을 이기는 이유는 그 말을 이길 엄청난 힘의 말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이길 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은 따 먹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흐렸습니다. 

말씀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단호하게 끊을 수 있는 힘이 말에 더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유혹의 달콤한 말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힘, 곧 성령을 말씀에 더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어떤 말보다도 믿을만하고 진리라는 확신을 주어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다른 말을 이기게 합니다.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닉은 엄청난 부자인 친구인 탐에게 초대받아 함께 머물게 됩니다. 탐의 아내 데이지는 캐츠비의 옛 연인이었습니다. 캐츠비는 가난했지만, 주류 밀수로 큰 돈을 벌어 빼앗겼던 연인을 찾기 위해 데이지의 집 앞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매일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리며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순진하기만 한 캐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얻습니다. 탐도 자기 아내의 불륜을 조금씩 눈치챕니다. 그러다 데이지가 탐의 내연녀를 차로 치는 사고를 냅니다. 순진한 캐츠비는 이것을 자신이 다 뒤집어씁니다. 

그러자 데이지는 캐츠비를 버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가 다시 탐에게 가려고 합니다. 이를 눈치챈 닉은 캐츠비를 위해 데이지를 그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평생 데이지의 사랑만을 믿으며 살아온 캐츠비는 데이지의 실수로 죽은 아내의 남편에게 총을 맞아 사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데이지의 이름을 부릅니다. 

캐츠비는 정말 위대한 사랑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닉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만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데이지는 캐츠비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캐츠비는 닉보다 데이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캐츠비가 살 수 있는 길은 닉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닉과 시간을 보내며 그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와 같습니다. 

저도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유혹이 끼여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혼해서 자녀를 많이 낳아 사제도 만들고 수녀도 만들면 더 주님께 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말이 저에게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널 원한다!”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던지 더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원하시는 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는 그 말씀에 힘이 없었습니다. 마치 천사의 말을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말씀이 인간이 되게 하셨듯이 기도를 거친 말을 말씀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씀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많을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혹을 이길 한 마디의 말씀이 없어서 우리가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광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광야에서 말씀의 무기를 가져 모든 유혹을 물리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나도 누군가를 위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광야로 가자, 하늘을 보자

 

사순 제1주일은 똑같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류의 조상과 주님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인류의 조상이 유혹을 받아 하느님처럼 되려다가 죄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반해 복음은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탄과 그 유혹을 물리치고 죄에 대해 승리하셨음을 대조적으로 전합니다. 

이런 대조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떠올리며 우리도 인류의 조상처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말고,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인류의 조상은 하느님처럼 눈이 열리는 유혹에 넘어간 데 비해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유혹을 연달아 받으셨지만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다운 선택을 하셨는데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묵상을 또한 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눈이 열려야 한다면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이 열려 빵이 아니라 말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빵을 보는 것은 눈이 열릴 필요도 없습니다.,우리가 욕망하는 것이고 저절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눈앞에 있어 눈을 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빵을 보고도 그 너머의 말씀을 보려면 너머의 것을 보려는 의지와 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보려는 의지는 내가 지녀야 하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은 주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주어져야 하고 주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처럼 유혹을 받기 전에 요르단강에서 세례와 성령을 받고는 성령의 인도로 유혹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가서 단련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탄과 유혹으로 단련되는 기간이 40일입니다. 이 기간을 덜 채우면 안 됩니다. 덜 채우면 덜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이 기간엔 천사의 시중을 받으라고 사탄이 유혹해도 천사마저 시중을 들지 않고 그 시중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사탄은 산꼭대기에서 세상 영광을 보여주며 자기를 경배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를 올려다보시며 하느님께 경배합니다. 

산꼭대기까지 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일이 뭐 있습니까? 세상 영광을 소유하려면 세상 가운데로 돌진할 것이지 세상을 떠나 뭣 하러 산꼭대기까지 애써 올라갑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세상을 떠나 광야로 가고,,산꼭대기를 오르더라도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보도록 합시다. 사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유혹을 주신 하느님을 보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광야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온몸으로 부딪히고 온삶으로 멍이 들며 깨닫습니다. 삶을 일깨우는 광야입니다. 공생활이 시작되는 광야입니다. 광야의 방향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욕망의 굴레에서 점점 작아지는 우리자신을 처절하게 만납니다. 

유혹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우리들을 보게 됩니다. 유혹에 붙들려 있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 우리를 이끄십니다. 생명의 길은 유혹의 길이 아닙니다. 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욕망의 질주를 멈추게 하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욕망의 높이는 욕망의 추락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그릇된 욕망은 하느님까지 시험합니다. 우리 영혼을 지탱하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한 사랑이 바로 신앙입니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광야도 하느님의 손이 뻗치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오히려 광야에서 더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고 충분합니다. 

광야에 나오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살아있는 신앙 치열한 삶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광야에서 가장 뜨거운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모든 여정이 사랑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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