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구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제 발은 올바른 길에 서 있나이다. 거룩한 모임에서 주님 찬미하오리다.
하느님,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 저희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자애로우신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3년 3월 6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다니엘서 9,4ㄴ-10)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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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루카 6장 36-38절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6일 (월)
이영준 모이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6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01
📌 강론시작 17:1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6일 (월)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06
📌 강론시작 12:5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6일 (월)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미사시작 36:22
📌 강론시작 46:1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거룩한 사람이란
구약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 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피하면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였고, 하느님 말씀 곧 계명과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에게 거룩함은 하느님의 가장 큰 특성이었기에, 하느님의 백성도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은 완전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형식의 표현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구약 성경의 거룩함과 마태오 복음의 완전함은 이제 ‘자비’로 드러납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입니다. 이제 구약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지 않으려고 심판하지 않거나, 단죄받지 않으려고 단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용서받으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심판받지 않았고 단죄받지 않았으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를 본받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다.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 존 란카스터 스팔딩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복희 씨의 삶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윤복희 씨는 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의 내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쫓아 떠돌게 되며 윤복희 씨 형제들은 고아처럼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던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윤복희 씨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유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출소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혼자 삶을 극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는 말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워낙 천재적인 무대 기질이 있었던 터라 열여덟 살부터 미8군 무대에 섰고 때마침 세계적 톱스타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른 루이암스트롱이 방한하였습니다.
루이암스트롱은 한국에 자신보다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윤복희 씨를 찾았고 윤복희 씨의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로 합니다. 이렇게 윤복희 씨는 소속사에서 집을 세 채씩이나 사 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랑도 찾아옵니다. 서울대 출신이자 독일계 혼혈 가수인 유주용 씨와 결혼합니다. 유주용 씨는 자신보다 윤복희 씨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벌어집니다. 유주용 씨가 윤복희 씨와 당대 최고 가수 남진 씨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을 벌이던 끝에 윤복희 씨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그 소문이 맞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정말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그 결혼이 유주용 씨에게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기에 남진 씨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윤복희 씨는 자기 남편이자 부모의 역할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유주용 씨도 자기를 부모처럼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윤복희 씨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무대에서 혼절하는 때도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고 치매만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혼자이기에 치매가 걸리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누군가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라는 게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복희 씨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와 같은 사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사람을.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부모처럼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니 그 빈 곳만 바라보며 계속 누군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행복을 바랐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나 돈, 명예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랑받으려면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받기 위해 사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싶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인지 찾는 것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다”라고 원해야 그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누가?”나 “무엇?”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배제되고 그러면 줄 것이 없어져서 얻을 것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게 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 주려면 부족한 게 없어야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같은 됫박으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것입니까? 무자비한 사람만 심판하고 단죄합니까? 그런 거라면 심판이란 무엇이고 단죄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묵인해주는 것입니까? 자비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 검사나 판사는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심판과 무자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그래서 주님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심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때 올바른 심판을 해야 하는데 검사나 판사들이 독재자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또는 그들의 편에 서 있어서 잘못된 심판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자비롭지 않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단죄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며 살게 하는 것이기에 죄인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게의 자비는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비이고 그래서 죄인에게는 심판도 단죄도 다 자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단죄가 전부이면 그것도 무자비입니다. 단죄를 하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무자비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돼!’하고 죽여 버리고 말면 그것은 사랑은 없고 단죄만 있는 것이기에 무자비한 겁니다.
미움과 분노의 단죄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누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할 때 단죄할 거리를 찾거나 없는 죄도 만들어 단죄하고는 그를 어떤 식이로든 파괴하거나 심지어 죽여 버리려 들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심판하고 단죄하는 그 무자비한 마음이 남한테만 그러할까요? 양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휘두르는 같은 칼로 자신을 먼저 베고 찌르는 법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남에게 퍼주는 그 됫박으로 그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죄의식이 없고 남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남을 단죄하면 단죄받고, 찌르는 칼로 찔리는 법이지요.
같은 식으로 용서하면 용서받고 사랑하면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면 많은 사랑을 받겠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평하심이고 정의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를 향한 심판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심판의 길입니다. 심판은 심판끼리 모이고 자비는 자비를 불러들입니다.
심판의 속을 들춰보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오고 가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더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가야할 용서의 길을 먼저 걸어가십니다. 되돌려드릴 수 없는 끝없는 용서의 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심판은 환불이 되지만 용서는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심판과 단죄의 되질이 아닌 용서와 자비로 되질하는 사순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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