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주님,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2023년 3월 13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열왕기 하권 5,1-15ㄷ)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 오늘 복음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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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복음
루카 4장 24ㄴ-30절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13일 (월)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0:3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13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0:09
📌 강론시작 22:2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3일 (월)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46
📌 강론시작 16:13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팔로티회 분당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3년 3월 13일 (월)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2:53
📌 미사시작 1:01:53
📌 강론시작 1:12:51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두 기적 이야기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러한 특성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내용은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의 두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하나는 엘리야를 통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하셨습니다.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그녀가 굶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먹으려고 남겨 둔 밀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빵 과자를 만들어 대접합니다. 그 뒤 그 집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예언자를 파견한 내용으로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습니다.
두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모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돈 지방이나 시리아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속하는 곳으로 이방인들의 지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하던 때부터 하느님께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고자 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구약 성경 시대부터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민족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속한 민족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믿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
- 순자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화가 나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거부한 상태인 이유
채종기 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분노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우리나라의 오랜 상징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범행 당시 68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 전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이런 망언을 늘어놓습니다.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 인명피해가 없고 이런 문화재는 재복원하면 되잖아요.”
토지 보상은 자신의 생존에 달린 문제입니다. 건설사는 약 1억 원의 감정평가를 내렸고 채종기 씨는 5억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분노를 나라에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분노는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따라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 행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늦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채종기 씨의 경우처럼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십니다. 마치 일부러 화가 나게 하시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분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나아만의 예를 드십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에 와서 자신들이 메시아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참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를 유유히 빠져나가십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임을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밀어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보다는 예수님의 말에 분노하는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감정을 추스르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문제는 반복됩니다. 감정이 생기는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김주환 교수는 우리가 여러 감정을 말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저에는 ‘두려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려움이 생기고 그 두려움은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 가지인데 투쟁-도피-경직의 세 반응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일어나면 이성은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위협에 다시 직면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식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고 달아나게 됩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생각합니다. ‘담부턴 이 산에 오면 안 되겠다. 근데 나라는 뭐 하는 거야? 저런 멧돼지를 잡지도 않고. 아 짜증 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이젠 운동도 하지 말라는 건가?’ 이렇게 감정은 생각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을 인식한 다음에 생겨납니다. 몸의 반응은 생존을 위해 저절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뇌 가장 깊숙한 곳에는 편도체의 아미그달라라는 생존본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진화의 가장 원시적인 부분입니다. 이 부분과 연결된 것이 자율신경계입니다. 자율신경계는 몸의 근육이나 장의 운동, 심박수나 체온 등을 담당하는데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붙어있습니다.
대뇌는 생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변연계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생존을 위해 신체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대뇌는 신체의 변화를 해석하여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그때의 기억보다도 감정을 기억하며 그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삶을 유지합니다. 이 역할을 전두엽이 합니다. 전두엽은 인간만이 가진 가장 발달한 뇌의 부분입니다.
자 이제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생존을 포기하면 됩니다. 생존을 생각하는 마음이 ‘불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존을 포기할까요? ‘평안’하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 해답을 압니다. 자신의 생존을 자신의 생존을 책임져줄 대상에게 마치 보험 들 듯이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유튜브에 네 살 아이가 호흡 곤란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결국 아이는 부모보고 자신을 안아달라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을 안으면 자신은 부모를 더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존재 안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에서 죽은 존재들입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어린아이가 자신을 부모의 포옹에 맡기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안긴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겼기 때문에 더는 잃을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잃을 생명이 있기에 불안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부모의 품 안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이때 분노나 화, 두려움 등이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시 생존권을 내어 맡길 대상을 만나지 못한 이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나의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겠다고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 품에 맡깁시다. 그러면 모든 나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보험입니다. 왜 돈에 대한 보험은 들면서 감정에 대한 보험은 들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회개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만 고쳐 주셨다고 고향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고향 사람일지라도 듣고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이런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런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일까요?
고향 사람 입맛에 맞는 말은 하지 않으려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고향 사람들을 사랑치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첨꾼이 아니라 사랑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첨꾼은 결코,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첨하여 그에게서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얻어내거나.이루려는 자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정 유익한 말, 곧 바른말을 하여 그를 진리와 진실에로 돌아서게, 다시 말해서 거짓과 잘못에서 그를 회개케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진실한 믿음으로 돌아서도록 도발하십니다. 왜냐면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적당히 얘기하면 또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폐부를 찌르는 도발적인 말을 해야만 똑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주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배척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말만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님도 배척합니다. 이제 이들에겐 주님이 고향 사람도 예언자도 구세주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무장하기에 보통 확신범과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는 확신에서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데 그 생각과 믿음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그러하지요.
요즘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된 믿음으로 확신에 차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고 천주교 신자들은 다행히도 그리 많지 않은데,그것이 꼭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확신범이 될 만큼 자기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향 사람들에게 회개를 바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믿음의 회개입니다.
잘못된 확신은 강할수록 더 큰 죄이고, 더 회개가 필요한데 자기가 믿는 종교만 옳다는 믿음.
하느님을 자기가 믿는 종교 안에 가두는 믿음.
곧 자기 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만 하느님이라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신자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
그래서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믿음은 하느님을 왜곡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경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리 회개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열망이 있기에 예수님의 여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뺄 수도 더 할 수도 없는 우리의 불편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묶이지 않으시며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꺾이지 않는 사랑이 있기에 시들지 않는 사람의 길이 됩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길은 버려야 할 시간도 있습니다. 선입견으로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하는 아픈 만남도 있습니다.
상처가 파견이 되고 상처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로 새롭게 시작하고 용서로 한 발 물러나며 새롭게 떠나갑니다. 사순(四旬)은 부활(復活)이라는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의 높이만큼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높이 만큼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할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여정에 감사하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장 아픈 시간도 거부할 수 없기에 기도로 받아들입니다. 굳센 정신의 십자가에서 뜨거운 길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참된 만남은 서로를 붙듵지 않으며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십자가가 되기 위해 십자가가 되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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