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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3/18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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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신다.

주님, 해마다 사순 시기의 재계로 파스카 성사를 준비하게 하시니 저희가 그 신비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3년 3월 18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3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호세아서 6,1-6)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오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3월 18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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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복음
루카 18장 9-14절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3월 18일 (토)
최광호 바실리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3월 18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56

📌 강론시작 15:39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8일 (토)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2

📌 강론시작 06:02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3월 18일 (토)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26

📌 미사시작 1:03:26

📌 강론시작 1:09:4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예로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의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런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본디 유다교에서는 속죄의 날에 단식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율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단식하는 횟수를 차츰 늘려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에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 것도 철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원에서 얻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바칠 정도였습니다(루카 11,42 참조). 기도 내용을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계층이었으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차이는 ‘기준’입니다. 바리사이의 기준은 자신의 행실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규정을 지키며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기준이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떠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그분의 구원을 청합니다. 자신의 행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느 부모님께서 친한 친구로부터 자녀에 대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7살 때 스케이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1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겨우 스케이트 날로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다른 운동을 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축구입니다. 그런데 공만 보면 피하기만 할 뿐, 신나게 달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를 본다면 어떤 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성장해서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단지 스케이트와 축구만 못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운동 종목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운동 중에서 두 종류의 운동을 잘하지 못한다고 운동신경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몇 가지의 모습만 보고서 ‘그가 틀렸다, 맞았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단 하나의 모습만 보고서 ‘그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서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또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단정 짓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외향적인 성격만 있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것을 너무나 즐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제게는 내향적인 성격도 분명히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몇 개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세리를 향해 ‘죄인’이라면서 손가락질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징수해서 당시에 점령국이었던 로마에 전해주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이 세리입니다. 당시 로마는 이 세리를 도급제로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일정액의 세금만 바치면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도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더 뭇 백성의 원성을 샀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모두 구원에서 제외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죄가 없다면서 이상한 감사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보다 자신을 낮추면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는 사람이 바로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모습은 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신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신념은 실천하면서 얻어지는 것이지 말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주얼 D. 테일러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감사와 아첨을 구분하는 법

 

1971년 12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동의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최악의 화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고들 중 하나이며 총 사망자가 200여명에 이릅니다.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사망 자 중에는 주한 대만 대사관 위셴룽(余先榮) 공사와 주한튀르키예대사관 무관 파질 유즈바시오글루 대령도 있었습니다.

이번 화재는 카페에서 사용하던 프로판가스 통에서 누출된 가스가 폭발하면서 발생했습니다. 화재발생 당시 호텔 내부에서는 안전규정을 위반하여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클러 등의 안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화재발생 직후 호텔 내부로 연기와 불길이 빠르게 번져, 숙박 고객들은 탈출이 어렵게 되었고 옥상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어 문 앞에서만 2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일들의 문제는 불 자체라기보다는 속이려하는 자들의 아첨과 아부에 속아넘어간 호텔 책임자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칭찬과 접대에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첨이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과 이웃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감사이지 아첨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도 예배가 아닌 아첨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아첨이었고 세리의 기도는 감사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바리사이가 훨씬 감사의 기도를 많이 드리는 듯 합니다. 세리처럼 죄를 짓지 않는 것에 감사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기도도 주님 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무언가 되는 존재처럼 여기며 자신을 들어높이는 기도도 있습니다. 나를 죽여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찬미가 진정한 감사요 예배입니다. 

‘시간을 달리는 남자’란 TV 프로그램에 나와 정형돈 씨에게 젊은 시절 엄마를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한 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진짜 잘 들어야 돼요. 길어! 마흔에 고혈압으로 크게 한 번 쓰러지십니다. 그리고 3년마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거든요? 그 중간중간에 쓸개, 자궁, 맹장을 떼 냅니다. 이거 잘 생각을 하셔야 해요. 50대부터는 당뇨, 고혈압으로 고생하시고 60대에는 심근경색으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십니다. 60 중반부터는 인공관절이라든지 관절쪽으로 수술을 많이 하시고. 70대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십니다. 이것을 다 견디실 수 있으시다면 ... 또 ... 저를 낳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 안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예배요 찬양입니다. 
키네레 사람 시몬은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신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분 아니면 구원은 물론이요,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음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내 뱀 같은 자아를 당신 피로 죽여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이렇게 나의 압제로부터 나를 이기시고 구해주신 분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모세로 우리를 파라오로부터 당신 피 흘리심으로 구해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께 도움이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주님을 예배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을 잘 알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지금까지 저는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니라고 많이 말해왔습니다. 복음의 악령들도 주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괴롭히려고 왔냐고, 그럴 것이면 제발 떠나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잘 알지만, 거부하고, 하느님 뜻을 잘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그런 앎은 오히려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기에 그 아는 것이 대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는 하느님을 알자고, 알려고 힘쓰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하느님을 잘 알려고 힘쓰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면 잘못 믿게 되고 시작부터 믿음이 잘못되겠지요. 

복음을 보면 잘못 아는 것에 대한 예를 주님께서 몸소 들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잘못된 하느님 이해입니다. 하느님을 모질고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으로 그는 이해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두려워 피하기만 할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는커녕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주님께서 또 드시는 예가 오늘 복음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자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잘못입니다. 

나쁜 짓은 하지 않고 교회 의무를 다하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더 큰 잘못은 하느님께서 그걸 좋아하실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단식과 십일조가 아닙니다. 단식과 십일조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만족이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렇잖습니까? 자랑할 데가 없어서 하느님 앞에서 자랑합니까? 

누가 자기 자랑이나 하러 제게 오면 저는 당장 쫓아낼 겁니다. 꼴불견이어서 쫓아내기도 하겠지만, 저를 사랑하거나 만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저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 온 것이기에 쫓아낼 것입니다. 

이것을 하느님은 다 잘 아십니다. 하느님은 나를 샅샅이 다 아시고 내 속마음까지 아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심을 잘 알고 자기의 참모습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이 당신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라 이웃 사랑이고 그러므로 이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십일조는 하느님 사랑의 십분의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십분의 일을 되돌리는 사랑이지요. 이는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십분의 일만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느님께서 미역국 끓여 드시겠습니까? 하느님께는 십일조가 필요치도 않고 그러니 그 십일조를 이웃에게 돌려주는 것을 더 원하실 겁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선물하는 것보다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 다시 말해서 형제간에 경쟁하며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모든 부모가 더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드리는 것, 그 사랑을 알기에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알라고 호소하는 호세아서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머리로 판단하는 지식의 습득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기도는 정녕 아닙니다. 가르침의 실천이 동반한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야말로 말보다 정직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기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른 양심과 복음적 양식인 겸손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르게 바라보는 안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오, 하느님!을 수 없이 부르는 것보다 나자신부터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도 신앙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사악해지면 그 어떤 악취보다 고약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교만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입(口)을 열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기도의 공동체이길 기도드립니다. 지난 시간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의롭게 되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 14)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드리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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