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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2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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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 주교가 목자의 사랑을 실천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형제들을 섬기며 언제나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24일 (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10,1-10)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24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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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복음
마르코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24일 (화)
최진묵 리카르도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02

📌 강론시작 08: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24일 (화)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43

📌 강론시작 17:2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24일 (화)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56

📌 강론시작 13: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여기에는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의 일생에 대하여 전하는 바가 거의 없는데,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일찍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음이 “어머니와 형제들”만을 언급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은 마치 당시의 신앙인들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하신 아버지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마르 14,36 참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포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입니다. 가족이 중시되고 같은 혈통을 가진 민족이 강조됩니다. 지난날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같은 혈통을 가진 이들은 한 마을에 모여 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자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새 기준입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하느님과 예수님의 친밀한 관계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 관계는 혈통이나 민족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가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한 부부는 살면서 이혼을 몇 번 생각할까요?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평생 살아가면서 이혼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또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평생 살아가면서 200번 정도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또 50번은 상대방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극도의 혐오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될까요? 바로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질 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삶 안에서 고통과 시련도 커지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부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였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은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 항상 결점을 없애려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을 전우로 여기고 기쁨을 함께 나누며 함께 어려움을 짊어집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지혜가 가득해야 합니다. 이 지혜는 자신이 먼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지혜롭고 완전한 사람이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생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삶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요구하는 삶이 아닌,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라고 끊임없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하는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내게 요구하는 사람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마르 3,22).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친인척이 찾아왔으니 다른 것을 다 뒤로 하고 먼저 만나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육체적으로도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모두 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진정한 형제, 누이,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요구하는 삶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요구를 들어주는 삶을 살고 있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 카렌 선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의 사랑법 : 하느님의 유전자를 볼 줄 알아야!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지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물론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보다 더 따른 사람이 없기에 성모님만큼 완전한 그리스도의 가족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겐 핏줄보다 강한 가족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을 그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발견함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려면 예수님의 이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형제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잭 캘리라는 한 신문기자가 소말리아의 비극을 취재하다가 겪은 체험담이 있습니다. 기자 일행이 수도 모가디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기근이 극심한 때였습니다. 기자가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었습니다. 

그 기자는 한 작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온몸이 벌레에 물려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배가 불룩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빨갛게 변해 있었으며 피부는 한 백 살이나 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마침 일행 중의 한 사진기자가 과일 하나 갖고 있었기에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허약해서 그것을 들고 있을 힘이 없었습니다. 

기자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서 소년에게 주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아서 들고는 고맙다는 눈짓을 하더니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자 일행이 소년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 작은 아이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완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이는 소년의 동생이었습니다. 

형은 자기 동생 곁에 무릎을 꿇더니 손에 쥐고 있던 과일을 한 입 베어서는 그것을 씹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입을 벌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동생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면서 동생이 씹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자 일행은 그 소년이 자기 동생을 위해 보름 동안이나 그렇게 해 온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결국 소년은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동생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형은 왜 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일까요? 부모가 같다는 이유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없어도 부모에게 효도하려 합니다. 받은 것이 있기에 나오는 의무감입니다. 이것이 형제간의 사랑을 만들고 가족을 만듭니다. 

형은 사실 동생 안에서 부모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형이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일은 없습니다. 형제들은 형제 안에서 부모의 유전자만 발견이 되면 이렇듯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유전자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우리 아버지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또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당에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나의 형제요 자매로 생각하고 부르는 것일까요? 어쩌면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양식을 통해 들어옵니다. 양식을 함께 먹으면 식구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성당 형제자매들이 혈육의 형제자매보다 덜 형제자매 같다면 어쩌면 우리는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곧 말씀과 성체는 우리가 같은 유전자(DNA)를 지닌 형제들임을 확증해 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처럼이 아닌 가족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화 ‘과속 스캔들’(2008)은 잘나가던 서른여섯 은퇴한 아이돌 스타에게 스물두 살 땔, 그리고 그에게서 난 여섯 살 손자가 찾아오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습니다. 차태현은 아직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자, 청취율 1위의 인기 라디오 DJ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10대에 사고를 쳐서 자녀가 있고 이미 할아버지라 한다면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는 딸과 손자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잃을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DNA 검사 결과 친자가 확실한 이상 자기가 살겠다고 딸과 손자를 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인기를 포기하고 결국은 가족을 선택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느닷없이 나타난 아이들의 DNA가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태현도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컸기 때문에 부모의 뜻이 그 안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양심상 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서로 싸운다는 말은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갈라져 싸우는 이유는 서로 같은 DNA를 부모로부터 받았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 부모까지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성체 성혈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처럼 지내려 노력하지 말고, 가족임을 인정합시다. 한 아버지를 둔 우리들은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고 그래서 부모가 되신 하느님의 뜻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힘으로는 생겨나지 않던 사랑의 감정이 생깁니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 혹은 하느님의 유전자,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온전한 사랑이 실천되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유전자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사람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유전자를 지닌 것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

 

오늘 복음을 보며 저 자신을 크게 반성합니다. 특히 저의 신원 의식에 대해 크게 반성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과연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인지 반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 마리아도 당신도 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분들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느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하며 하느님 말씀을 그 자리에서 걷어차지 않고 주님의 종이니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주님도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라는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당신 사명으로 삼으셨고 그래서 아버지 뜻이 당신 뜻이었지요.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신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당신 뜻이었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런 일을 하셨고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마리아와 주님과 저를 비교할 때 저도 말로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프란치스코의 말을 인용하여 자주 떠들어대고 있고, 또 매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라고 주문 외듯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신의 뜻은 당신이 알아서 이루시라고 하는 것이지,,여기엔 예수님처럼 내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들이 되려는, 아들은 못 되어도 도구는 되려는 의지와 진정성이 없습니다. 

저는 인사이동과 같이 굵직한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만,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할 때는, 예를 들어 반찬을 먹거나 물을 먹을 때는 거의 대부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아무 생각 없이 저 좋을 대로 먹고 마십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저는 주님처럼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만 하느님은 진정 나의 아버지라는 의식이 없거나 약한 것이고, 그러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기도에 앞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신원 의식,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원 의식을 가져야겠습니다. 이것을 뼈아프게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사랑의 공동체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적 사랑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주고 받는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형제적 사랑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랑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랑을 주십니다. 우

리의 사랑을 성장시킬 수 있는 참된 가족은 여기에도 있습니다. 고귀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매 순간이 가장 소중한 순간들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찾는 길은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실행의 문을 열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 또한 사랑이 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실행하는 사랑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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