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2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26.
반응형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하느님, 복된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사도의 지혜와 용기를 주셨으니 그들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현세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다가 마침내 천상 고향에 이르게 하소서.

 

2023년 1월 26일 (목)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티모테오 2서 1,1-8)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복음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2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
루카 복음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평화방송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023년 1월 26일 (목)
손경락 사도 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56

📌 강론시작 07: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26일 (목)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25

📌 강론시작 17:00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26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7

📌 강론시작 06:5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할 때 상징적으로 “열둘”을 강조하지만, 루카 복음은 일흔두 제자를 언급합니다.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한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어떤 사실을 입증하려면 둘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여러 고을로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그 나라를 드러내도록 파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명을 받아 파견되고 모든 일에 대한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긴급한지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곳으로 파견됩니다. 이제 그들도 예수님처럼 적대적인 이들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명은 오로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이는 수확에 대한 표현으로도 잘 드러납니다. 수확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결실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의지하여 파견되는 제자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우리에게 오늘, 또 지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나날이 선포하여라, 그분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시편 96[95],2-3).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혹시 전에 어디선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서양의 고전음악 작곡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기에게 음악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전에 어디선가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배운 적이 있다고 하면 수업료를 2배로 청구했고, 배운 적이 없다면 오히려 수업료를 절반만 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을 배웠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우선 그 찌꺼기를 털어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 가르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들단 말이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탁구를 배웠었는데, 처음에는 기본기를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배워서 기본기가 엉망인 사람은 자세를 다시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만큼 실력이 향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탁구를 배울 때 기본기부터 먼저 탄탄하게 익힌 사람은 금세 실력이 향상됩니다. 
 
성당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당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주로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던 열심한 분이십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자기 생각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툼과 논쟁을 계속하면서 분열을 가져오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똑같은 모습으로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까? 그런 주님을 자기의 좁은 마음 안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고정관념까지도 버릴 수 있을 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며 일흔두 명의 제자를 둘씩 보내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떠나는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고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람에게도 의지하지 말라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모든 것을 버려야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했을까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나아가는 기본기는 오로지 하나, ‘비움’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모두 버려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아무것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십시오.

- 성 베네딕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의 불이 타오르게 하는 유일한 방법

 

왜 애플사는 창조적일까요? 그들은 모든 경쟁사보다 훨씬 더 혁신적입니다. 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것일까요? 그가 미국 민권운동 이전에 고통받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시대의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였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트 형제는 동력 조절 유인 비행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골든 써클(Golden Circle)이라 부릅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이 작은 아이디어는 몇몇 단체 그리고 리더들이 왜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왜?”라고 했을 때 “이윤 창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왜”라는 것은 즉, 무엇이 당신의 목적인지? 당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의미합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왜 존재합니까? 당신은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납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애플사의 사례를 주로 듭니다. 애플사가 다른 여타 기업과 같다면, 그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이렇겠죠. 

“우리는 훌륭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것들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에, 쉽게 이용할 수 있고 편리합니다. 사고 싶나요?” 

애플사가 실제로 선전하는 방식은 이렇죠. 

“우리가 하는 모두 것들, 우리는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은 제품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간단히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싶은가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저는 정보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이트 형제의 일화만큼 좋은 예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은 사무엘 피에폰트 랭리(Samuel Pierpont Langley)에 대하여 모릅니다. 20세기 초, 인력에 의한 비행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의 닷컴 열기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시도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성공 비법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미 육군성에서 5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버드 학위가 있고 학술 협회에서 일했으며 인맥 역시 아주 좋았죠. 

그는 그 당시 모든 지식인을 알고 있었죠. 그는 풍부한 자금으로 최고의 지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후 시장 상황은 훌륭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어디서나 그를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랭리를 지지했죠. 그런데 어째서 그에 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요?

백여 마일 건너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올 빌, 윌버 라이트 형제가 있었죠.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자금도 없었고. 그들은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 팀 중 누구도 대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올빌, 윌버 둘 다 말이죠.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는 그들을 취재하지 않았죠. 

다른 점은, 올빌, 윌버 이들은 이유, 목적,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행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세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과를 추구했죠. 그는 부유함을 추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을 믿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랭리의 직원들은 단지 월급봉투를 위해 일했죠. 랭리가 잘못된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증거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날, 그가 그만두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963년 여름, 250,000명의 사람이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에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초대장도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죠. 킹 목사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이 미 인권운동 초기에 고통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변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그리고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이유를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몇몇 사람들은 조직화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여기 250,000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나왔죠,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나온 것일까요? 제로(0).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죠,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아닌. 

정치가들이 그들의 12가지의 포괄적 계획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리더와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힘의 위치 혹은 권위를 쥐고 있죠.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이들은 영감을 줍니다. 그들이 개인이건 혹은 단체이건 간에,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르죠. 우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왜”와 함께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다른 이를 찾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의 TED 강연,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이끌어낼까’ 강연의 줄거리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방법을 ‘골든 서클’로 설명한다. 이유(Why) ➡ 방법(How) ➡ 결과(What)입니다. 인간 뇌를 횡단면으로 자르면 골든서클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뇌의 겉에 있는 신경들은 행동을 지시 내리지는 못합니다. 느끼고 반응할 뿐이죠. 그러나 가운데 있는 신경은 행동하고, 말을 하라고 지시 내릴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 가장 가운데 변연계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믿음’이 형성됩니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왜의 순서로 산다면, 믿음이 심겨진 이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의 순서로 삽니다. 육-혼-영의 순서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은 영-혼-육의 순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영 안에 당신의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심어진 이들은 평생을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증명할 꿈이 없다면 아직은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의 성격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 나라 둘째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쉬게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는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그냥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을 죽이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왜?’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이웃에게 휴식과 에너지와 양식이 되어주라는 명령이 들어있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은 방법을 찾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가 심겨진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찾는 이들이 와서 쉬게 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믿음의 성장

 

한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은 어떻게 탄생할까?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또 믿음은 어떻게 성장할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생각게도 하고 답도 주는 것 같습니다. 예외적인 사람 외에 믿음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생겨나고 성장하는데 바오로 사도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두 성인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지난 설날 저희는 가족이 없거나 갈 곳이 없는 분들과 보냈는데 그중에는 탈북자들이 여럿 있었지요. 

올해는 거의 모든 탈북자가 비신자여서 제상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강론 중에 북에서는 제사 때 조상들께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물었는데 북에서는 김일성만 믿을 뿐 조상도 신도 믿지 않는다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사실로서 제가 북에 갔을 때도 여기저기 김일성을 신격화한 구호들, 예를 들어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라는, 오직 신에게만 쓸 수 있는 구호가 돌에 새겨져 있곤 했지요. 

제 생각에 사람은 다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믿든 어떻게 믿든 믿고, 자기를 믿든 다른 사람을 믿든 믿고,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믿든 도둑놈으로 믿든 믿고, 하느님이 없다고 믿든 계신다고 믿든 다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있다고 믿지 않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믿음을 시작할 수 없으면 믿게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앞서 얘기한 탈북자처럼 신에 대해 한 번도 얘기들은 바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선배, 믿음의 전달자가 있어야 하는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탄생에는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고, 계시의 주님께서 탄생케 해주시는 거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자기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 줄 알고 신나게 가다가 엎어지고, 눈이 먼 사람 그러나 그때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를 먼저 들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의 엄마, 믿음의 선각자, 믿음의 선배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말로 가르치기 전에 존재와 삶으로 가리킵니다. 

가정에서는 엄마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교회에서는 성인 성녀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고, 세상에서는 믿는 이들 특히 수도자 성직자들이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제 말로서 하느님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교리 교육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신앙 간증의 형태가 될 수도 있지만 행복한 사람의 힘이 있는 가르침 곧 바오로 사도처럼 확신에 찬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이, 이제는 그대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디모테오가 자기의 아들이라고 함은 믿음의 아들이라는 뜻이겠지만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먼저 디모테오에게 믿음을 심어줬고, 그 믿음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심어진 믿음을 성장케 한 것이 바로 자기라는 듯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합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와 티토는 이런 면에서 참 부러운 관계입니다. 그래서 어제 바오로의 회심 축일에 이어 오늘 두 성인의 축일을 지내는 걸텐데 우리 안에서도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일꾼은 많은데 일꾼다운 일꾼은 참으로 많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일꾼다운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로 선택되고 기도로 성장되고 기도로 파견되는 기도의 일꾼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청빈한 일꾼이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청빈해야 주님께서 함께하실 살아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청빈은 내외적(內外的)인 평화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래서 일꾼들은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청하여라 할 것은 기도이며 나누어야 할 것은 주님의 평화입니다. 

일꾼을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참된 치유가 일어납니다. 수확할 것과 수확할 일꾼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것을 놓치고 살기에 공동체는 혼돈스럽습니다. 공동체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기도이며 함께 모여 찬미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일꾼들의 변화된 삶 변화된 공동체의 새로워진 삶에서 시작합니다. 일꾼은 공동체를 공동체는 일꾼을 향해 열려있으며 서로를 살립니다. 일꾼들을 살게하는 기도로 새날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