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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2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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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2023년 1월 2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10,32-39)
    많은 싸움을 견디어 냈으니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코 4,26-34)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27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복음
마르코 4,26-34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27일 (금)
최진묵 리카르도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27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29

📌 강론시작 13:0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27일 (금)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52

📌 강론시작 12:2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오늘 첫째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로 불립니다. 땅에 뿌린 씨는 저절로 자랍니다. 농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모릅니다. 씨가 자라 수확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어들일 뿐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하여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지만, 봄이 되면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을 보여 주며 가을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놀랍거나 화려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이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늘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그렇게, 당연하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변화를 일상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없던 싹이 나고 잎이 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싹이 자라는 과정을 하느님 나라에 비기십니다. 놀라운 변화이고 생명의 성장이지만, 우리는 농부처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에 현존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렇게 우리 안에서 “저절로”, 곧 하느님의 섭리로 충만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다른 여느 때보다 우리를 포함한 창조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삶의 터전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고민하며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감탄하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 없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갑곶성지에 있을 때,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미사에 참석한 아이에 대한 기억이 남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다른 아이와 달리 이 아이는 똑바로 앉아서 제 강론을 너무나 열심히 경청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아이를 보니 저 역시 신이 나서 강론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른들은 전혀 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크게 웃으며 제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미사 후에 아이에게 “신부님 강론 잘 들어줘서 고마워.”라면서 막대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전 처음으로 사탕을 받아 본 아이처럼 좋아하며, “아싸~”를 외칩니다. 이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탕 하나 더 주게 되더군요.
 
어린아이는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탄사를 자주 외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웬만한 일에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뇌의 기능 탓이라고 하더군요. 뇌의 대뇌피질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때만 활성화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매 순간이 새로운 정보이니 대뇌피질이 활성화되어 감탄사를 외치지만, 어른은 새로운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감탄사가 없는 것입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탄하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 없는 삶이 재미있을까요? 감탄이 없는 삶은 너무 힘듭니다. 뇌가 활성화되지 못해서 삭막한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세상 사람들이 잘 하지 않는 사랑 실천, 봉사활동, 그 밖에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것을 감탄사 넣어가며 열심히 실천하면 신나는 삶이 됩니다. 감탄하는 삶이 훨씬 재미있고 기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얻는 것도 더 많아집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들면서, 농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또 어떻게 자라는지 몰라도 수확할 때까지 저절로 자라는 씨앗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당연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하느님 나라가 우리 곁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충분히 감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함에 주님께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나의 감탄사를 찾는 데 집중했으면 합니다. 이 감탄사를 들으신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의 크신 섭리를 깨달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꿈을 가져라. 계획을 세워라. 그리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 약속하건대, 당신은 거기에 이를 것이다.

- 조 코플로비츠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나라는 꿈을 주려는 꿈이 심어지는 것

 

왜 애플사는 창조적일까요? 그들은 모든 경쟁사보다 훨씬 더 혁신적입니다. 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것일까요? 그가 미국 민권운동 이전에 고통받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시대의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였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트 형제는 동력 조절 유인 비행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골든 써클(Golden Circle)이라 부릅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이 작은 아이디어는 몇몇 단체 그리고 리더들이 왜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왜?”라고 했을 때 “이윤 창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왜”라는 것은 즉, 무엇이 당신의 목적인지? 당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의미합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왜 존재합니까? 당신은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납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애플사의 사례를 주로 듭니다. 애플사가 다른 여타 기업과 같다면, 그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이렇겠죠. 

“우리는 훌륭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것들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에, 쉽게 이용할 수 있고 편리합니다. 사고 싶나요?” 

애플사가 실제로 선전하는 방식은 이렇죠. 

“우리가 하는 모두 것들, 우리는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은 제품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간단히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싶은가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저는 정보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이트 형제의 일화만큼 좋은 예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은 사무엘 피에폰트 랭리(Samuel Pierpont Langley)에 대하여 모릅니다. 20세기 초, 인력에 의한 비행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의 닷컴 열기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시도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성공 비법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미 육군성에서 5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버드 학위가 있고 학술 협회에서 일했으며 인맥 역시 아주 좋았죠. 

그는 그 당시 모든 지식인을 알고 있었죠. 그는 풍부한 자금으로 최고의 지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후 시장 상황은 훌륭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어디서나 그를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랭리를 지지했죠. 그런데 어째서 그에 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요?

백여 마일 건너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올 빌, 윌버 라이트 형제가 있었죠.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자금도 없었고. 그들은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 팀 중 누구도 대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올빌, 윌버 둘 다 말이죠.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는 그들을 취재하지 않았죠. 

다른 점은, 올빌, 윌버 이들은 이유, 목적,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행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세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과를 추구했죠. 그는 부유함을 추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을 믿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랭리의 직원들은 단지 월급봉투를 위해 일했죠. 랭리가 잘못된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증거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날, 그가 그만두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963년 여름, 250,000명의 사람이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에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초대장도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죠. 킹 목사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이 미 인권운동 초기에 고통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변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그리고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이유를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몇몇 사람들은 조직화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여기 250,000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나왔죠,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나온 것일까요? 제로(0).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죠,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아닌. 

정치가들이 그들의 12가지의 포괄적 계획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리더와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힘의 위치 혹은 권위를 쥐고 있죠.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이들은 영감을 줍니다. 그들이 개인이건 혹은 단체이건 간에,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르죠. 우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왜”와 함께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다른 이를 찾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의 TED 강연,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이끌어낼까’ 강연의 줄거리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방법을 ‘골든 서클’로 설명한다. 이유(Why) ➡ 방법(How) ➡ 결과(What)입니다. 인간 뇌를 횡단면으로 자르면 골든서클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뇌의 겉에 있는 신경들은 행동을 지시 내리지는 못합니다. 느끼고 반응할 뿐이죠. 그러나 가운데 있는 신경은 행동하고, 말을 하라고 지시 내릴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 가장 가운데 변연계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믿음’이 형성됩니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왜의 순서로 산다면, 믿음이 심겨진 이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의 순서로 삽니다. 육-혼-영의 순서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은 영-혼-육의 순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영 안에 당신의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심어진 이들은 평생을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증명할 꿈이 없다면 아직은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의 성격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 나라 둘째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쉬게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는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그냥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을 죽이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왜?’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이웃에게 휴식과 에너지와 양식이 되어주라는 명령이 들어있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은 방법을 찾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가 심겨진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찾는 이들이 와서 쉬게 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떤 사람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다음 구절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그런데 너무 지나친 해석이 아닌지 모르지만 이 말씀이 제게는 주님의 고심을 나타내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알아들을 수 있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시는. 

사실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인 우리가 저세상, 곧 하느님 나라를 알아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그 설명을 설사 잘 알아들었다 해도 우리의 관심은 무관심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열심히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신 주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하느님 나라를 아들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초대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아무튼,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애쓰시는데 오늘은 하느님 나라를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같다고도 하시고, 우리가 뿌리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저절로 자라 열매 맺는 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그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곧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씨를 뿌렸는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인 줄 모르기 십상이고,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더더욱 모르기 십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 실천이, 우리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 씨앗일 수 있고, 그 작은 사랑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큰 사랑이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을 생각하면 참 신기합니다. 씨앗 박사가 아니라면 씨앗만 보고 어떤 씨앗인지 모르고, 그 씨앗에서 어떠한 열매와 꽃이 열릴지 우리는 모릅니다. 

씨앗이란 이토록 작고 알 수 없지만,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여러 가능성이고 무한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하느님께서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본래 참 신기한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더 신비롭습니다. 

저는 <여기 선교 협동조합>과 <여기 밥상>을 하고, 또 콩나물국밥을 하면서 이런 신기함이랄까 신비함의 체험을 많이 합니다. 

콩나물을 키우는 것도 참 신기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고 시작한 사업이 점차 이런저런 사업으로 발전하여, 지난해에는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26명에게 매월 10만 원씩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이 되고, 또 국밥집에선 쌀이 떨어지면 누가 때맞춰 쌀을 보내줍니다. 

어제도 이제 쌀이 떨어지고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쌀 20kg을 보내오셨습니다. 며칠 전 제가 그런 기적 체험 얘기하는 것을 듣고, 당신도 동참하는 차원에서 보내신 것인데 그것이 때를 잘 맞춘 거였지요. 

이 어떤 분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고, 모르고 하는 우리 행위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있음을 성찰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하느님의 나라는 겸손의 나라입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자라나고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이치와 순리 안에서 반성과 부끄러움을 만납니다. 삶의 관점과 태도를 바꾸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듯 사람과 하느님의 나라 또한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있는 그대로 자라나고 있는 그대로 있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자연이 변해 가는 아름다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어우러지고 이어지는 씨앗과 열매의 기쁜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성장과 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순리입니다.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삶의 전환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자녀들의 겸손한 삶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가장 맑은 사랑임을 믿고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한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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