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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3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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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30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11,32-40)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30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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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복음
마르코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30일 (월)
장우호 야고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47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30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2

📌 강론시작 16:10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30일 (월)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34

📌 강론시작 14:3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주제가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공생활의 시작에 예수님의 능력을 구마로 소개한 바 있는 마르코 복음은 다시 한번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1,21-28 참조). 

두 이야기 모두 악령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과 오늘 복음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적과 함께 복음 선포라는, 예수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의 외침에도 그것을 막지 않으셨으며, 이 사건은 주민들을 통하여 그 지방에 퍼져 나갑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악령이 들렸다가 제정신을 찾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함께 있기를 청하는 것은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이 ‘함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14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치유받은 이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을, 주님의 자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바라던 사명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릅니다. 

여기서 부르심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자신의 원의가 아니라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각자의 선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속 좁은 생각은 속 좁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어느 사람이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직장의 한 동료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스트레스가 벌써 1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1년 동안 그분과 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군요. 그런데 참지 않고 복수해도 그 지긋지긋한 관계는 멈출 수 없을 텐데요.” 
 
복수한다고 상대방이 무서워서 피할까요? 아마 또 다른 방향으로 복수할 것입니다.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은 누가 되든 상관없이 빨리 끊는 것이 제일 유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 좁은 생각은 속 좁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넓은 생각, 긍정적인 마음은 마찬가지로 넓고 긍정적인 좋은 반응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이 악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 유익하겠습니까? ‘나는 안 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안 될 것은 또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뻔한 것이라고 하셨지요. 사회에서도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남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특별한 사람이 더 인정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역시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당신이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을 더 좋아하시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서,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지요. 그래서 나가긴 하겠지만, 산 쪽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청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한 명의 사람이 더러운 영으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모두 함께 기뻐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자기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들은 속 좁은 생각에 잡혀 있습니다. 한 명의 구원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아닌, 자기들의 물질적인 손해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사랑보다 작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속 좁은 마음으로는 주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여러분은 인내해야 하며, 우리 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을 아시는 주님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집착과 애착의 더러움

 

마르코복음에서는 드물게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 얘기를 오늘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만큼 마르코복음이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들여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저도 이 얘기를 중요시하여 자주 강의와 강론 때 다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번 강의와 강론을 했음에도 더러운 영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했을 뿐 더러운 영들이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뒤 어떻게 됐을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돼지와 함께 물에 빠진 더러운 영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돼지와 같이 죽었을까요? 

돼지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렇게라도 게라사 지방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 거지요. 그러니 세상을 그리고 자기가 살던 곳을 더럽게 집착하는 영이 더러운 영이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영이란 죽었어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려 하지 않고 세상과 자기 살던 곳을 맴도는 존재이잖습니까? 

우리 민속 신앙에서 이런 영들은 극락왕생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돈다고도 하는데 하느님 나라에도 가지 못하고 자기 지역에서도 쫓겨났으니 구천을 떠돌까요? 

저도 이런 영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영적인 존재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영은 훌훌 날아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최선이고, 하느님께 아직 갈 수 없다면 연옥이나 지옥에 머물든지 해야 하는데 더러운 영은 이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지구에서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고 교회의 공식 가르침도 저의 주장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는 게라사의 더러운 영들이 돼지 속에서라도 자기 지방에 남게 해달라고 한 점이지요. 

저는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인데 제 친구가 서른셋에 죽고 허무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때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꿈에 친구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밝아서 꿈에서 깼을 때 저는 친구가 하느님께 갔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저는 그때 친구를 떠나보냈습니다. 더 이상 제 친구로 붙잡고 있지 않게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꿈에라도 어머니 얼굴 보고 싶은데 보여주시지 않으니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영적으로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들처럼 이 세상이나 저의 곁을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신 표시라고 생각되어 위안을 삼습니다. 

사실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그리고 보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를 내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의 딸로 보내드리자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러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아직도 보고 싶은 애착이 남아있습니다. 

떠나지 못하고 떠나보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집착과 애착을 돌아보는 오늘 우리이고, 이런 면에서 나도 더러운 영의 존재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인격과 더러운 영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의 인격을 더러움 속에 가두어 둘 순 없습니다. 뒤죽박죽같은 더러운 영을 내쫓아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길을 찾게 됩니다. 인격으로 시작하여 인격으로 완성되는 창조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리의 인격은 정화되고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우리의 인격을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뿐인 목숨이 고귀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우리가 계속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성실하신 사랑의 창조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깊어가는 둘숨과 날숨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고있는 우리들입니다. 더러운 영의 이름값이 아닌 소중한 인격의 이름값을 하며 살라고 공동체가 있습니다. 사랑의 성찬이 이루어지는 감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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