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0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1.
반응형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2월 1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12,4-7.11-15)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오늘 복음
    (마르코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복음
마르코 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일 (수)
한덕훈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7:3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일 (수)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55

📌 강론시작 18:29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일 (수)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08

📌 강론시작 07: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

 

‘집’이나 ‘고향’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애틋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가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표현이 무려 119번이나 나오는데, 이 표현이 늘 좋은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통’이라는 틀에 매여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예레 11,17; 바룩 2,26; 에제 3,7 참조).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탈출 20,2; 신명 5,6)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12,1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이나 고향, 곧 과거의 전통과 자기의 예전 생각에서 떠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배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서 첫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뽑으신 것이었는데(마르 1,16-20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새 가족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이 가족을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우고 만드신 새 가족이 나자렛의 옛 가족과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곧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넘어집니다. 나자렛 주민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는 과거의 전통과 생각과 신념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옛 집과 고향(자기 생각, 신념, 전통, 문화 등)에서 끊임없이 나오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을 자신보다 앞세우는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지에 따라 믿는 이의 삶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라고 고백하시며 늘 당신보다 하느님 아버지를 앞세우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귀하게 여겨야 사랑하는 마음도 생긴다.

 

아는 지인이 있는데, 이분의 차는 늘 상처투성입니다. 차 옆에도 또 뒤에도 어디에 긁힌 자국이 보이고, 어디에 부딪혔는지 찌그러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차는 소모품이라서 잘만 굴러가면 그만이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얼마 전에는 새 차를 뽑았다고 하는데, 또 얼마 못 가서 벽에 부딪혀서 또 큰 수리를 해야만 하셨습니다. 운전경력이 30년 넘었음에도 왜 이렇게 운전에 미숙할까요? 
 
이에 대해 차량 전문가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운전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차를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차를 사랑한다면 함부로 운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그만큼 귀하게 여깁니다. 정말로 아끼는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소중하게 다루고 혹시라도 상처가 날까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그 사람을 귀하고 있었습니까? 혹시라도 상처를 입지 않을까 싶어서 귀하게 대하고 자기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배우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또 내 자녀,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친한 친구와 회사 동료에 대해서는 어떠했습니까? 
 
귀하게 여겨야 사랑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내 뜻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이 변화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있음’ 자체로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 그때 사랑이라는 소중한 감정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영 좋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신분, 직업, 그리고 가족을 이야기하며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사랑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니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도 없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예수님을 귀하게 여깁니까? 가장 가까운 나의 이웃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주님도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서 매일 같이 ‘무엇을 달라.’, ‘남보다 더 잘 살게 해 달라.’,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달라.’ 등의 요구만 하면서, 마치 주님을 나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종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그날그날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라.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애정 지옥 탈출법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훈육하실 때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의 권고와 훈육을 얘기합니다. 영어로 얘기하면 ‘Exhortation and discipline of the Lord’입니다. 

맥락을 뜯어볼 때 주님께서 한 번 또는 여러 번 권고를 해주셨는데도 그 권고를 듣지 않을 때 주님께서 훈육을 하시는데, 이때.그 훈육의 형태는 책망의 형태, 채찍질의 형태, 시련의 형태를 띱니다. 

한 번이나 두 번 권고해서 바로 말을 들었으면 이런 형태의 훈육을 하지 않으셨을 텐데 그러지 않으니 훈육을 하신다는 말이고, 아비가 아들에게 하듯 주님도 우리를 아들로 사랑하기에 하시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앞에서 친절하게 훈육이 영어 는 ‘Discipline’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훈육의 의미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섭니다. 

이 ‘Discipline’이 수도 생활 그것도 수도승들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군대에서도 중요하고 군대에서는 계속되는 훈련으로 한편으로는 군인 정신을 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반복입니다. 한 번에 정신이 길러지지 않고 능력이 습득되지 않기에 반복하는 것입니다. 

수도 생활에서도 이 ‘Discipline’의 목적과 원칙은 같습니다. 밖에서 제멋대로 살던 사람을 수도자로 양성하기 위함이고,,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원 규율과 관습에 맞는 사람이 될 때까지 반복 훈련 또는 훈육을 하는데 이것을 Discipline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제2의 성격이라고 합니다. 습관이 잘못 들면 성격처럼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 들어있는 것이고,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그런 뜻이 들어 있는 거지요. 

‘버릇’, 한자어로 ‘습’, ‘습관’, 이 말들은 오랫동안 반복으로 인해 형성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습득(習得)’이라는 말도 반복을 통해 얻는다는 뜻입니다. 한자어 習이라는 말 자체가 ‘익히다’, ‘반복하여 행하다’는 뜻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버릇이나 습관이 오랫동안 잘못 형성된 것이라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반복된 교정이 필요하겠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마치 오래 잘못된 자세를 고치는 것처럼, 고통스럽겠지요. 

주님의 권고나 가르침이 훈육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 훈육이 책망과 채찍질과 시련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형태의 훈육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하고, 이 훈육이 사람이나 사건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히브리서가 책망을 듣거나 시련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은총으로 받아들이라 하는데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훈육을 받는 사람뿐이 아닙니다. 

어쩌면 훈육하는 사람이 더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두 번 권고해서 안 되고 계속 훈육해도 안 될 때 낙심하여 훈육을 포기하기 쉬운데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훈육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받는 이나 주는 이 모두 인내의 사랑이 필요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편견의 아픈 땅을 뚫고 올라오는 2월의 새싹을 만납니다. 다시 처음인 만남입니다. 믿음은 선입견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것은 주님께서 개입하실 작용의 여지마저 두지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관계는 서로를 아프게 하는 아픈 관계입니다. 

아픈 관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은 고정관념의 상대가 아니라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이 나타나도 고정관념으로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오만과 편견의 위선을 반성합니다.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따뜻한 사랑입니다. 사랑과 믿음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소중한 공동체의 사람들입니다. 마음을 무너뜨리는 일은 이제 그만입니다.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물건이 아닌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시간을 사는 것이지 물건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환영하지 않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심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입니다. 환영과 친절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2월의 첫날 새 아침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