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0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3.
반응형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2월 3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13,1-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6,14-29)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복음
마르코 6,14-29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3일 (금)
장동현 미카엘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7:1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3일 (금)
이길재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11:12

📌 강론시작 19:17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3일 (금)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2

📌 강론시작 06:4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먼저 요한에게서 배웁시다.

 

오늘 복음에는 세상의 사람 “헤로데”의 이름이 일곱 번, 하느님의 사람 “요한”의 이름이 일곱 번 거듭됩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두 이름을 일곱 번씩 드러냄으로써 두 삶을 철저히 대조하고 서로 맞서게 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이 가운데 어떤 삶을 살지를 곱씹어 보라는 것 같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는 체포, 감옥, 구금, 처형, 죽음, 무덤과 같은 표현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표하듯 등장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는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선구자였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부터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반기며 기뻐하던 요한은(루카 1,44 참조), 예수님에 앞서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에 앞서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이사 53장 참조)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인 요한의 외침과 선구자다운 증언의 삶을 우리 삶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를 씻고 악습을 끊어 내는 회개의 삶, 헛된 욕망을 정화하는 기도와 절제의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진리를 상대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희석시키며 세상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이 세상에(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참조) 대하여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는 그의 용기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된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늘 좋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그분께 희망이 되어 주었을 테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말하며 늘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하여 먼저 요한에게서 배웁시다. 그러고 나서 요한의 정신과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 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집 짓는 것의 반은 부수는 것.

 

보통 건물의 재건축 논의는 지은 지 몇 년을 기준으로 진행될까요? 보통 30년을 기점으로 재건축 논의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준공 30년이 경과된 건물만 재건축할 수 있습니다. 
 
이 ‘30년’이라는 시간을 보면서, 저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건축물도 30년이 지나면 새롭게 다시 짓는데, 제 마음은 옛날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원래 ‘나’는 어쩔 수 없다면서 새롭게 만들려는 논의조차 못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재건축된 곳은 너무 멋집니다. 물론 재건축 들어가기 전까지 많은 논의를 비롯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이 과정을 거쳐서 재건축이 이루어지면 깨끗하고 멋진 공간으로 재창출됩니다. 우리 마음도 새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저분하고 복잡한 내 마음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야 깨끗하고 멋진 내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변하는 것은 불가능해’, ‘나는 이런 마음이 편해’ 등등 자기 마음의 재건축을 가로막는 잘못된 마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나의 멋진 미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드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갑곶순교성지를 처음 시작하며 경당을 지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건축 설계사는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해주시더군요. 
 
“신부님! 집 짓는 것의 반은 부수는 것입니다.” 
 
먼저 완전히 부수어야 짓는 것이 수월해집니다. 자기 마음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부수어야 할 것을 찾고, 또 실제로 부수어야 합니다. 미움의 마음, 욕심과 이기심,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섣부름, 함께 보다 혼자의 마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 마음, 나만 사랑받으려는 마음…. 이런 마음을 부술 때, 재건축이 멋지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 난 것이다,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임금은 이 소문에 깜짝 놀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며 두려워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뒤에,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주었던 것이지요. 바로 헛된 맹세, 자기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 등으로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려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깊은 반성과 함께 이제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재건축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두려워 떨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냥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새롭게 재건축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하느님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하든 지나친 일은 없다.

- 아르스의 성 비안네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죄책감을 인감의 힘으로 없앨 수 없는 이유

 

많은 심리 프로그램에서 어렸을 때의 죄책감을 잊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그러나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없앨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책감도 인간의 능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없애는 힘도 인간에겐 없습니다. 

영화 ‘타임머신’(2002)에서 남자 주인공은 애인에게 청혼할 때 강도에 의해 애인이 총에 맞아 죽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애인을 살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타임머신을 만들어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리고 빨리 장소를 이동해 애인이 강도를 만나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차에 치여 죽습니다. 계속 과거로 돌아가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애인은 죽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인간이 하려는 노력이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운명’입니다. 이 운명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죄책감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양심에 의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이 죄책감을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미 발생한 사건을 없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지난 50년간 모은 130톤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24시간을 홀로 지내는 할머니 사연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7번이나 당하고도 여전히 위험천만한 8차선 도로에서 파지를 줍습니다. 파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가 향한 곳은, 어마어마한 쓰레기 담벼락 앞입니다. 할머니가 쌓은 쓰레기 담은 자그마치 길이 65미터, 높이 1미터 62센티에 달했습니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쌓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심지어 거대 쓰레기 담을 지나 들어간 할머니의 집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도 겨우 드나들 정도로 비좁습니다. 게다가 집 안은 오래 방치된 폐지와 쓰레기들이 썩어 악취와 오물들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보입니다. 대체 할머니는 왜 이토록 쓰레기에 집착하시는 걸까요?

할머니에게는 딸이 있습니다. 매일 전화도 합니다. 그러나 딸을 따라나서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왜 한사코 쓰레기로 묻힌 집을 고집하는 것일까요? 할머니는 본래 부자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편하게 컸는데, 딸을 키울 때는 매우 어려워진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딸을 부유하게 키우지 못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주워 모으면 언젠가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딸에게 못다 한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할머니가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딸을 고생시키며 키운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법 싶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죄책감을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제작진은 130톤의 쓰레기를 깨끗이 치워주겠다고 말합니다. 

쓰레기는 할머니가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50년간 모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치워줄 수 있다고 말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능력이 있는 이가 죄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마르 6,14)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적이 있으신 분께 무릎을 꿇을 겸손함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요한을 죽인 죄책감을 스스로의 믿음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하시는 분께 그 죄책감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청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자신은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해 달라는 식의 예절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자존심이 죽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마음이 죽는 것입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축구공으로 커다란 학교 현관문을 깨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반 선생님은 저희 가정의 처지를 알고는 아이들에게 돈 50원씩 가져오라고 하고 당신이 얼마를 보태서 그 문의 수리비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문을 깨 먹은 죄책감을 더는 갖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모든 죄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은 몰라도 인간은 자신이 준 그 피해를 온전히 보상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드님까지도 죗값으로 지불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죄가 없다고 하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죄책감도 믿음입니다. 믿음의 영역은 믿음으로만 상쇄됩니다. 하느님만이 인간의 모든 죄를 없이 하실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우리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형제애 실천을 하려면

 

“형제 여러분,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오늘 히브리서는 형제애 실천을 계속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제애란 어떤 것입니까? 

형제애란 일단 형제간의 사랑을 뜻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서는 사랑에 여러 사랑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고, 그 여러 사랑 가운데에서 형제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형제적인 사랑, Brotherly Love 또는 Fraternity는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자유, 평등, 박애라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 구호 중에서 박애가 실은 Fraternity를 형제애라 번역하지 않고 박애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여기서 박애란 앞의 평등과 연결하여,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널리 사랑한다는 뜻에서, 뒤집어 얘기하면 자기 형제만 좁게 사랑하는 것과 반대되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 같은데 말 그대로 번역하면 형제애라고 번역해야겠지요. 

그렇다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형제애는 이것과 같은 뜻일까요? 같은 뜻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 구호와는 다른 뜻도 있을 겁니다. 아니, 다른 뜻이라기보다는 깊은 뜻 또는 넓은 뜻이 있을 겁니다.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형제애에는 하느님이 숨어 있지요. 모든 이의 한 아버지요 같은 아버지인 하느님 말입니다. 모름지기 형제란 한 아버지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손님을 그저 손님으로 보지 말고 천사로 보고, 감옥에 갇히고 학대받는 사람을 그저 불쌍한 사람 정도로 보지 말고 내가 그 경우에 처한 것처럼 보라고 오늘 히브리서의 가르치는데 사실 자기처럼 여기고, 자기 형제처럼 여기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일반 사회적으로는 손님이 내 물건 사주는 손님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감옥에 갇힌 이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범죄자일 뿐이고, 박해받는 사람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이웃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는 이웃을 신화(神化)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대단할까요?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요? 

제게는 형제 안에서 나를 보는 것보다 형제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더 어렵고 대단한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제는 일 마치고 오다가 손수레로 폐지를 줍는 영감님이 한 손은 손수레를 잡고 한 손은 담벼락을 잡고 꼼작 않는 것을 봤습니다. 갑자기 혈당이 떨어지고 힘이 완전히 빠져 그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같이 본 젊은 사람과 함께 댁까지 할아버지를 모셔드렸는데 요즘 나이들이 많아 여기저기 아픈 제 육신의 형제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의 희생자를 내 자식처럼 보는 것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버려지는 아이들을 내 아기 내 손자처럼 보는 것도 내 안에 인간적인 사랑이 조금만 있으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신앙이 없으면 힘들고 신앙인이라도 하느님 관상을 깊이 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형제로 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형제애를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내 것이 아닌 하느님의 생명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우리들 교만입니다. 돌처럼 굳어가는 우리들 양심입니다. 모든 불행의 근원은 멈추지 못하는 우리들 과욕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갈 집은 언제나 예외없이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숨길 것이 없습니다. 살인의 부활이 아니라 사랑과 회개의 부활이 되어야 합니다. 되풀이되는 역사에서 삶의 교훈과 참된 삶의 가치를 배웁니다. 

망가지고 버려진 생명까지 되살려 다시 소중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잊혀지고 잊어가는 소중한 분들의 사랑을 다시 기억합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들입니다. 

양심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의 길을 걸어간 세례자 요한에게서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길을 봅니다. 우리는 어떠한 길을 걷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양심성찰과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며 사랑을 실천한 수 많은 세례자 요한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올려놓고 만나야 할 것은 우리들 양심뿐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