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2023년 2월 2일 (목) 주님 봉헌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봉헌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말라키서 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오늘 복음
(루카 2,22-40)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그리스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시네.
복음
루카 2,22-40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2일 (목)
장우호 야고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53
📌 강론시작 08:58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2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6:35
📌 강론시작 16:19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2일 (목)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5
📌 강론시작 07:27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가 보고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빛
주님 성탄 대축일이 어느덧 사십 일이 지났습니다. 성탄의 밤에 우리에게 오신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떠올려 봅니다. 그 아기는 어둠과 죽음 속에 있는 이들을 비추기 위하여 떠오른 ‘빛’이었습니다(루카 1,78-79 참조).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주님 봉헌 축일의 역사는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미 4세기부터 이 신비를 기억하며 ‘만남 축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시고, 또한 시메온과 한나처럼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을 기다리며 충실히 살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이들과 만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 성탄 대축일 빛의 예식에서, 세상의 참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베들레헴에서 목동들 위에(루카 2,9 참조), 그리고 멀리서 그 빛을 따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통하여(마태 2,2 참조)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러난 ‘모든 민족들의 빛’이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꼭 사십 일 전에 우리는 베들레헴의 빛을 보고 찾아온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현인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그 빛을 따라 살고자 다짐하였습니다. 그 빛이 우리가 보고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빛이라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번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이 빛이 아니라 예쁘고 화려한 듯 보이는 다른 빛들도 많습니다. 그 빛들을 따라 자기 희망과 꿈을 키우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베들레헴의 아기를 우리 각자의 성전에서 새롭게 만나라고 초대합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아기를 두 팔에 감싸 안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유일한 별을 새롭게 만나고 그 빛을 저마다의 가슴속에 간직하라고 말합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뜻이고, 한나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의 삶이 주님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나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완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어느 책을 읽다가 여검사의 초임 검사 때의 경험을 읽게 되었습니다. 초임 검사 때이니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할까요? 그런데 조사받는 사람이 이 여검사를 향해 계속해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이 불쾌해서 “아가씨라뇨!”라고 짜증 섞인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사받는 사람이 “아! 그러면 아줌마입니까?”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검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검사로 보이지 않으니, ‘검사’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짜증을 냈던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듣고 싶은 소리가 있고, 또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갖춰야 했습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런 듣기 싫은 말을 한다고 짜증 내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칭찬, 사랑, 기쁨, 행복의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그 말을 하고, 그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은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 다음 사십 일째 되는 날에 주님 봉헌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성전에 예수님을 봉헌하실 때, 시메온 예언자와 한나 예언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0-32)라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아마 아기 예수님께서도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정답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나 예언자 역시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기에,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듣고 싶은 말을 해야 하고, 보고 싶은 행동이 있으면 내가 먼저 보고 싶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주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그에 걸맞게 생활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적합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만나겠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며 지극히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간은 운명의 포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의 포로일 뿐이다.
- 프랭클린 D.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모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떻게 될까?
‘유퀴즈’에서 이천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이정숙 씨)의 사연에 진행자들도 눈물을 참지 못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살던 어머니는 시골에 사는 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시골로 시집옵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을 시골로 보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서울로 올라와 살 것이라는 사위의 말을 듣고 시골로 시집보낸 것입니다. 자신에 셋째가 부모를 모실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형이 다리에 장애가 있고 아이들이 일곱이라 지금 자기가 분가해서 밖으로 나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 조카들까지 다 업신여김받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조카들 클 때까지만 함께 시골에 살자고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효심에 그러자고 하였고 지금까지 평생을 시골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부패한 백신을 맞아 오히려 결핵에 걸려 아이를 업고 여섯 달 동안 매일 업고 통원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매일 아이를 업고 걸어야 했던 시간이 무려 네 시간입니다.
친정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다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도와주겠다고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나 사돈과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 아니라며 8km나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임종 전날 어머니를 방문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사슴 밥 줘라. 나 때문에 이렇게 시간 뺏기면 어떡하냐!”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모습에서 당신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한 시골 집에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어머니의 피 흘림이었습니다. 따님은 그렇게 한 가정에서 훌륭한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을 하느님 집에 봉헌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이는 인간이 그 부모의 봉헌을 통해 성장함을 말해 줍니다.
부모가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여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데도 반대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 품 안에 품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 자녀가 성장하지 못하게 봉헌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자녀를 나라와 천주께 봉헌하는 편지는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 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네가 상소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는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 마리아의 편지가 원본이 없다는 이유로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중근의 담당 간수였던 헌병 치바 도시치가 전한 말을 사이토 다이켄이라는 일본 스님이 『내 마음의 안중근』(1994)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과 유사하고, 황성신문 (1909년 12월 28일) 기사에서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편지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조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천주와 나라에 봉헌하였고 그는 그렇게 성장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봉헌하지 않으면 아들은 어머니라는 감옥에 갇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어디로 봉헌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정체성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에서 나라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은 또한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진 아들을 향한 믿음에서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혹은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게임 중독자인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어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시킨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의 저자 김민경씨입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아버지만이 자녀를 봉헌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낳고 자신들이 키웠으니 자녀는 자신들의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봉헌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천민 아이를 사무라이로 만들겠다고 한 어머니는 자신이 성의 기둥으로 들어가 죽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들어가도 자녀는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능합니다.
이 배가 가라앉아야 어쩔 수 없이 다른 배로 옮겨 탈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배에 계속 머무르려 할 것입니다. 새끼 새를 자신이 떨어뜨리면 새가 날갯짓하겠지만, 다른 존재가 떨어뜨리려고 다가오면 몸을 움츠리게 됩니다. 봉헌은 부모만의 특권이기도 하고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내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떤 방향으로도 성장할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자녀의 성장은 부모가 어디로 봉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신성에 참여하는 봉헌
주님 봉헌 축일인데 성탄 40일 되는 날, 주님의 부모가 주님을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념하는 것은 주님 봉헌이 성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인데 생각해보면 이 축일의 의미가 인간적으로는 인간 부모가 주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가 아드님을 봉헌하시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봉헌은 하느님께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아버지 뜻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을 바치시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의미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을 우리에게 봉헌하심은 우리도 우리를 당신처럼 봉헌하라는 뜻인데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를 봉헌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되신 그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라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것에 바치지 않고 하느님께 바치면 감히 말하지만 우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님께서는 처음 당신을 바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 인간인 우리가 당신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고, 마지막 만찬 때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길을 열어주시기는 하셨는데 아무리 열려있어도 우리가 들어가야 들어가는 것이듯 열린 길에 들어설지 말지, 신성에 참여할지 말지 선택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에게 길은 열려있지만, 갈림길이라는 뜻입니다.,술만 먹으면 개차반이 된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자신을 마구 굴려 개차반이 될 수도 있고,반대로 자신을 귀히 여겨 귀인이 될 수도 있는이 갈림길에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을 택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저의 강론은 원래 여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청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러니 뒤의 얘기는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녀 심청에게 자신을 바치면 아버지 눈을 뜰 수 있다는 제안, 곧 아버지의 눈과 자기의 목숨을 바꾸는,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심청은 물론 많이 망설여졌겠지만, 자신을 바치는 쪽으로 고귀한 선택을 했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눈도 뜨고 자신도 고귀한 왕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요르단강물에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같은 헌신의 의미이고 같은 구원의 의미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바침으로 가난하고 비천했던 그의 신분이 왕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눈도 뜨게 하고 전국 모든 눈 먼 이의 눈도 덩달아 뜨게 하였지요.
우리도 심청이처럼 자신을 헌신한다면 주님 봉헌에 참여하는 것이요,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 주님 봉헌 축일에 주님과 같은 봉헌의 삶을 살려고 수도자의 길에 들어선 나는 그 길을 계속 잘 가고 있는지 지금은 어디에 헌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 바쳤다.
제대 위의 촛불은 하느님을 향해 타오릅니다. 촛불은 촛불의 고유한 향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바쳐진 우리들 삶입니다. 봉헌은 구체적인 봉헌 생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참된 봉헌입니다.
주님의 생활 방식이 바로 봉헌입니다. 기도도 봉헌이고 청빈도 봉헌이고 정결도 봉헌이고 순명도 봉헌입니다. 성숙한 삶은 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봉헌은 분열이 아닌 일치의 삶입니다. 그래서 봉헌의 삶은 불만과 비판 불평과 고집을 멈추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깊은 근원에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오늘을 봉헌합니다. 사랑도 봉헌이고 창조도 봉헌이고 진리도 맡겨드림의 봉헌입니다. 형제들의 공동체는 이렇듯 다양성을 통하여 열려있으며 기도와 사랑 봉사와 말씀으로 복음화됩니다. 세속화의 중심에는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봉헌이 없습니다. 수도 생활은 공동체 생활이며 하느님의 가치를 따르는 축성 생활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하느님 사랑의 자녀다운 삶이란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고 실현되는 축성의 고유한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역동적이고 순수하며 신비적이며 직접적인 삶의 일치는 축성입니다.
축성 생활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초 봉헌처럼 봉헌을 먹고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사랑의 선물임을 믿고 희망으로 가장 좋은 오늘을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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