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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20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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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3년 1월 20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8,6-13)
    그리스도는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20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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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복음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20일 (금)
이창영 이레네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5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20일 (금)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8:51

📌 강론시작 17:12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20일 (금)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32

📌 강론시작 12:4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그분과 함께 있는 것

 

성경에서 ‘산’은 지형적으로 평지보다 높은 곳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산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하느님과 가까운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고, 산은 그분께 다가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은 모세가 하느님께 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나이산에 올랐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 사건은 하느님의 뜻이 직접 전해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져 성경 전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모세의 예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로, 하느님의 뜻이 계시된 장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마르 6,46 참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이미 이런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산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십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제자들은 응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첫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왜 자기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이것 해 주세요. 저것 해 주세요.”라고 부탁만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제 이름도 모르고, 저의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알아서 하세요.”라고 말까지 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아주 간단한 것이라면 해 줄 수도 있겠지만,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것이라면 거절할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지금 너무 어렵습니다. 돈 좀 주세요.”라면서 제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꽤 큰 금액이었기에 제게 그런 부탁을 한다면 저를 잘 아는 사람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저의 이름도 몰랐고, 새벽 묵상 글을 통해 저를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신부’라는 이유로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구 사회복지회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신부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잖아요.”라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분과의 만남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어이가 없으실까 싶더군요. 
 
기도도 잘 하지 않고, 주님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을 찾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자기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화를 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신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왜 자기 뜻이 이루어져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먼저 하느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뜻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 3,15 참조).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박해 속에서 고통과 시련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순교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의 사랑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사랑을 봐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사랑으로 갚아주십니다.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도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전전이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 토마스 에디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표징 없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응석받이가 아니라 사도로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오늘 히브리서는 하느님께서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새 법을 새겨주실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처음에는 모세를 통해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는 그것을 계약의 판에 새겨 간직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모세 대신 주님께서 친히, 그리고 계약의 판 대신 마음에 새로운 계약을 새기게 하셨다는 말씀이겠습니다. 

우리말에 명심이라는 말이 있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또는 어른이 젊은이에게 중요한 일을 당부한 다음에 ‘이것을 꼭 명심하라’하고 하는데 그 뜻이 바로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지요. 

명심이란 말이 바로 새길 銘자에 마음 心자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중요한 말씀일수록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종이에 적어, 잊지 않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런데 그 종이가 바람에 날아갈 수도 있고 그 종이를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더 좋은 방법, 제일 좋은 방법은 마음에 새겨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의 관행과 조금 다릅니다. 

우리의 명심의 경우 어른들은 말만 하고 그 말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젊은이의 몫인 데 반해 신적 명심의 경우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께서 몸소 새겨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겨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부동산 중개업자가 불만이 없도록 쌍방의 이해관계를 잘 고려하여 계약서에 기입을 한 다음 도장을 찍게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이해관계를 잘 중개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주님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시고, 하느님은 우리 임금이 되시고 우리는 그 백성이 되도록 중매를 서는 중개자십니다. 

이에 대해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되도록 중매를 서고, 부모와 자식 관계가 되도록 중매를 서는 중개자시면 좋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그리고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가르치심으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오늘 히브리서가 하느님과 우리 관계가 임금과 백성의 관계라고 굳이 얘기하는 뜻은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건설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얘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사도로 삼으십니다. 이 부르심은 제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여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둥들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은 우리도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딸로서 사랑에 안주하는 응석받이가 되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책임감 있는 백성이요 사도로 부르심 받았다는 자각과 함께 자부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우리가 놓쳐버린 마음이란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입니다. 머무름은 짧고 지나침은 빠르고 깁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고 주님과 함께 지내는 행복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무름 안에 길이 있습니다. 내어주어야 서로를 살리는 머무름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자연스레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부르심과 머무름의 목적지는 같습니다. 가야할 곳이 하느님 사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열려있기에 머무를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머무름의 여정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사랑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머무름이 사는 곳이 공동체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나누는 사랑이 머무름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주님과 함께 지내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먼저 머무르는 사랑의 관계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머무름 안에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그냥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좋은 길이 열립니다. 가장 좋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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