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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1/1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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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1월 17일 (화)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히브리서 6,10-20)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월 1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복음
마르코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월 17일 (화)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8:0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1월 17일 (화)

 

📌 미사시작 08:46

📌 강론시작 17:08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1월 17일 (화)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9

📌 강론시작 6:4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은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의 갈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축제로 여겼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 것처럼 매주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감사를 드리는 하루의 축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한 주간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지키던 수많은 율법 가운데 1/3 정도가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규정의 문구에만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며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의미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물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세상 창조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창조된 모든 것을 보존하고 보살피도록 맡기셨고(창세 1,28 참조), 사람은 그 창조 업적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피조물이면서 유한한 존재로 휴식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일수록 본래의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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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갑곶순교성지를 떠나서,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의 주임신부로 생활합니다. 13년 만에 본당신부로 생활한다고 하니, 기대도 되고 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엄습합니다. 그러나 아주 열심하고 교회에 헌신적인 신자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들과 함께 재미있고 기쁘게 생활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지난주, 이곳 김대건 성당으로 오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장 이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가지고 있는 짐을 정리하려는 마음에 직접 짐을 정리했습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짐을 정리해보니 얼마나 많은 짐들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옷장을 열어 옷을 정리했습니다. 20년 넘은 옷도 있었고, 살이 쪄서 맞지 않아 언젠가 체중을 줄여서 다시 입을 것으로 생각했던 옷도 많이 있더군요. 아깝다고 또 가지고 다니자니, 짐이 많아질 것 같아서 지금 당장 입을 수 없는 옷들 과감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옷장으로도 충분한 양이 되었습니다.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문구류를 좋아해서 서랍 하나가 문구류로 가득합니다. 잘 쓰지 않는 펜을 정리하니 역시 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책장도 정리했습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언젠가 다시 읽을 것이라는 생각에 계속 끌고 다녔던 책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보던 책을 비롯한 15년 이상 된 꽤 많은 책을 과감하게 처분했습니다. 
 
이렇게 짐을 정리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만 두었구나.’라고 반성하게 됩니다.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나눌 수 있는 것들도 기쁘게 나눌 수 있어야 했는데, 나 혼자만 쓰고자 하는 욕심과 이기심이 물건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음을 깨닫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주님은 보지 않고 나만 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가 있지요.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라고 따집니다. 밀 이삭 몇 개 뜯은 것이 뭐가 대수일까 싶지만, 이들은 확대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지금 추수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려고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기준만을 내세웁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과 이기심에 주님의 뜻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트 2,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에 갇혀서 사랑을 실천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비워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회는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 크리스 그로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에게 안식이 없는 이유 : 물에 빠졌으면서 땅을 잊었기에!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여기서 예수님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다고 하니까 안식일은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이 그들의 주인입니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쉬며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있는 날인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율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은 자신들이 지배해야 할 것의 지배를 받고 살까요? 돈의 지배를 받고 명예나 쾌락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그 집착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잠깐의 쾌락을 위해 양심을 저버립니다. 반드시 무언가는 삶의 이유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글로리’라고 넷플릭스에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내용은 한 아이가 학교 폭력을 지독히 당하여 이 악물고 커서 복수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공감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김동은이라고 하는 아이가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부모는 이 아이의 합의금을 들고 도망을 갑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는 김동은은 자살하려고 몇 번이나 건물 위에 오르고 바다 앞에 섭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를 죽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은 ‘복수심’이었습니다. 복수심은 그녀를 견디게 했습니다. 

만약 복수가 끝나면 그녀는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유를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짐승들이야 그저 생존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어서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유를 찾습니다. 물론 그 이유들도 동물들과 결국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한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찾아낸 삶의 이유는 결국 나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김동은은 복수하고 싶으면서도 복수를 질질 끌 것입니다. 빨리 끝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복수가 끝나면 어디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무석 정신분석학 교수는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있을 때 계속 자해하는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으면 우주에 붕 뜬 존재처럼 느껴져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살 이유가 없는 것은 벌써 죽은 것보다 더 고통스럽습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자기 부모가 죽는 것을 목격한 한 아이가 부모의 복수하기 위해 평생을 기다렸는데 그 대상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기억을 회복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래야 복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회복한 그는 본래 매우 착한 사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보다 훨씬 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더는 살 이유가 없습니다. 복수하려던 그가 자살합니다. 

인간이 삶의 이유를 찾는 이유는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나의 존재 이유를 정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쾌락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것들이 없으면 나도 존재 이유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들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 나의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내가 돈의 것이 됩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인간이 지배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들을 지배하지 못하고 지배당합니다. 그것들이 삶의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 법이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며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들이 선택한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 이유로부터 자유로운 누군가를 보면 참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를 나를 만든 분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분이 있건 없건 그렇게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돈이나 명예, 쾌락이 존재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의 노예가 되는 시스템에서 우리에게 어떤 선택의 삶이 더 낫겠습니까? 

영화 ‘그래비티’는 결국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 곧 지구에 발붙이고 살지 않으면 우주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하는 존재가 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있을 때 우주에 떠도는 것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 공간에서 헤맬 때는 자신을 잡아줄 무언가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출처를 인정하지 않는 삶과 그것에 순종하는 삶의 차이가 이럴진 데 사람 대부분은 그래도 지구로부터의 자유, 그러나 우주 쓰레기에 집착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여기면서.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모든 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지구에 발붙이지 않으면 우주 쓰레기라도 움켜쥐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뭍으로 가는 게 의미여야 하고 우주에 떠 있는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는 게 의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것에 목숨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이 없는 이유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이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발을 씻기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의식성찰

 

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질러가다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고, 그로 인해 제자들은 영락없이 바리사이들에게 트집 잡힙니다. 

제 생각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생각 없이 한 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위이지 고의로 한 행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의식적 행위를 보고 바리사이는 영락없이 트집을 잡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관련해서는 영락없는 사람들입니다. 

영락없다는 말은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보고도 아무 소리 하지 않으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로서 영락없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러니 그들은 그들다운 것입니다. 율법을 늘 의식하고 사는 사람다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밀 이삭을 따먹습니다. 밀 이삭을 따먹을 때 율법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의식조차 없습니다. 

바리사이의 눈에 이런 제자들은 개돼지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제자들 눈에 율법은 보이지 않고 먹는 것만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제가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두둔한다면 그들은 초월적인 무의식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초월하는, 곧 상위의 사랑을 더 의식하고 사람을 더 의식하지, 하위의 율법을 더 의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무엇을 더 의식하며 살 것인지, 사랑과 법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하며 살 것인지 ‘의식 성찰’을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막을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수도생활의 여정입니다. 수도생활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완성됩니다. 덧없는 세월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벅찬 은총의 여정입니다.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목마를수록 찾게되는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자유입니다.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자유입니다. 

부서지지 않고서는 안식일의 주인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수도생활의 역사를 만듭니다. 복음으로 흘러갑니다. 사막의 고독에서 넘치는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이 영광입니다. 낮게 더 낮게 더 낮은 곳으로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기에 무수한 빛깔로 펼쳐지는 은총의 빛에 오늘을 봉헌합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이 되어오신 안식일의 주인을 믿습니다. 

더 깊고 더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오늘을 내딛습니다. 사랑은 막을 수 없고 이 사랑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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